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수절하는 기생 무운을 사랑한 이경무
이경무(1728~1799)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사직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금위대장, 훈련대장을 거쳐 형조 판서를 지냈다. 그가 강계부사가 되었을 적에 그 고을에 무운이란 기생이 있었는데, 용모와 재능이 뛰어나 당시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울에 사는 성 진사란 자가 우연히 강계에 왔는데 무운이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고는 애정이 매우 깊어졌다. 성 진사를 전송한 뒤로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쑥으로 뜸을 떠서 종기가 난 것처럼 하고는 몹쓸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이경무가 부임하여 그를 불러다 보고는 가까이하려고 하였더니, 무운이 종기 난 곳을 풀어 보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첩에게 이런 종기가 있어 감히 사또를 가까이서 모실 수 없습니다." 이경무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너는 내 앞에서 잔 심부름이나 하는 것이 좋겠다." 이 때부터 무운은 낮이면 청지기 노릇을 하고 밤이면 그의 처소로 돌아가곤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4,5개월이 지나자 어느 날 밤에 무운이 갑자기 이경무 앞에 나와서 말하였다. "오늘 밤에는 사또를 잠자리에서 모실 수 있겠나이다." 이경무가 되물었다. "네가 몹쓸 병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그런 말을 꺼내는가?" 무운이 대답하였다. "첩이 성 진사를 위하여 수절을 하였기 때문에 제가 일부러 쑥으로 뜸을 떠서 종기가 난 것처럼 하여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또를 모시고 몇 달을 지나면서 사또의 동정을 지켜보았사온데 참으로 훌륭한 대장부이십니다. 첩이 아무리 식견이 없는 비천한 기생이기는 하오나 어떻게 사또를 흠모하여 존경하는 마음이 없겠나이까?" 이경무가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네 마음이 그와 같다면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겠다." 그 후에도 여느 때처럼 대해주며 유달리 가까이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무운이 따라오기를 바라므로 이경무가 말하였다. "나에게는 본처와 첩까지 있으니 너를 데리고 가는 것은 편안하지 못하겠구나." 무운이 말하였다. "만약 그러시다면 첩은 수절을 하겠나이다." 그러자 이경무가 다소 비웃는 투고 말하였다. "네가 말하는 수절이란 성 진사를 위함이냐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이냐?" 무운이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즉시 단도를 가져다가 자신의 왼쪽 손가락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이경무가 깜짝 놀라 데려가겠다고 하였지만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작별하고 말았다.
10여 년이 지난 귀에 이경무가 훈련대장이 되어 성곽과 나루를 보수하고 정비하던 무렵의 어느 날, 무운이 찾아와서 뵙기를 청하므로 이경무가 기뻐하며 불러다 보고 그와 거처를 함께 하면서 밤에 그를 가까이하려고 하였더니 있는 힘을 다하여 완강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이경무가 그 까닭을 물으니, 무운이 대답하였다. "사또를 위해서 수절하기 때문입니다." 이경무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이미 나를 위하여 수절한다면 어찌하여 나마저 거절한단 말인가?" 무운이 말하였다. "그 뜻은 이미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맹세하였기에 감히 사또의 명령도 따를 수 없나이다."
1년 동안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 뒤 이경무의 처가 죽자 무운이 상중에 달려와 서울에 머물다가 장례를 치른 뒤에 되돌아갔으며, 이경무가 죽었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 스스로 운대사란 호를 짓고 그대로 자기 집에서 일생을 마쳤다. 이경무의 시호는 무숙이다.
순라군으로 시문을 잘하여 어전에까지 불려간 왕태
왕태(?~?)의 일명은 한상이고 자는 보경, 호는 수리이다. 고려 왕씨의 후손이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워 나이 스물 넷에 김성을 가진 노파의 주막에서 술상 나르는 일을 거들면서 얻어먹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술상 나르다가도 틈만 나면 책을 앍으므로 처음에는 노파가 그러지 말라고 꾸짖자, 그 뒤로는 책을 품고 다니면서 읽기도 하고 간혹 밥을 짓는 불빛으로 책을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노파가 그의 뜻을 갸륵하게 여겨 날마다 초 한 자루씩을 사주어 밤에도 열심히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더니 이 때문에 문장이 크게 향상되어 그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언젠가 금호문(창덕궁 돈화문의 서쪽문) 밖에서 징발된 병졸 대신 보초를 서는데, 이 날 따라 달빛이 유난히도 밝기에 움막 속에서 나와 "상서" 한 장을 외우니 그 목소리가 쇠붙이와 돌을 치는 것처럼 낭랑하였다. 마침 그 때 대사간 윤행임이 그곳을 지나다가 그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여겨 수레를 멈추고 그를 불러 보았더니, 더벅머리에다 의복은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윤행임은 놀라면서도 그를 알아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가 '강물이 맑아 밤이면 안개 끼는 때가 적다'고 시를 지은 왕상한이 아닌가?"
그 뒤에 소문이 대궐의 임금에게까지 알려지자 임금이 그를 불러다 시를 짓게 하였더니, 몇 걸음 옮겨 놓으면서 이렇게 읊었다.
따뜻한 바람은 신하들의 검은 장막에서 일고 아침 햇살은 대궐의 붉은 문에 비치도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왕태가 정조 77년(1787)에 경점졸(북과 꽹과리를 쳐서 시간을 알리는 군졸)로 복무하면서 틈만 나면 대궐 밖 순라군이 머물러 있는 곳에서 글을 읽었는데,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불러오도록 명하여 그의 용모가 건장함을 보고 경서와 사기를 강독하게 하였더니, 임금이 명이 떨어지자마자 외우기를 물이 흐르듯 거침없이 하였다 한다. 그는 또 시를 지었으므로, 임금이 차례를 뛰어넘어 발탁하여 우림장으로 삼고, 잇달아 큰 철장을 하사하여 야간에 궁성을 순찰하게 하였으며, 조령별장에 임명하였다.
도둑에게 해진 갓을 되돌려 받은 정민수
정민수(?~1830)의 본관은 월성이고 자는 기범, 호는 벽산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여 섬겼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거친 음식마저도 거르기가 예사였다. 걸칠 옷이 없어 맨발에 왼쪽에는 짚신을, 오른쪽에는 나막신을 신고 시장에 낙 물건을 팔아 그날그날 어머니를 봉양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초하루와 보름달에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메고 가서 성묘를 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그렇게 하기를 삼년상을 마칠 동안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를 가리지 않았다.
그가 본래 의술을 배웠지만 이루지 못하고 시 읊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다가 나이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겨우 장가를 들었는데 배는 불룩하고 머리칼은 짤막하였다. 그는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책을 자루에 넣어 적성의 암거천 가로 가서 살았다. 그런데 그 무렵에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구하러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무리 수십 명이 몽둥이를 들고 밤에 그 집으로 들어가 식량을 빼앗으려고 위협하였다. 정민수가 마침 울타리 틈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나 짤막한 작대기를 내보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는 뭐 무기가 없겠는가? 도대체 너희들이 나를 어쩌겠다는 것이냐?"
도적이 하도 어이가 없어 크게 웃자 정민수도 따라서 크게 웃고는 사립문을 활짝 열어젖혀 그들을 모두 들어오게 해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남은 물건이 있거들랑 모두 가지고 가지고 가거라."
관솔에 불을 붙여 집안이 환하게 보이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방안에는 단지 물러나는데, 그 중 한 명이 정민수의 갓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정민수가 도둑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타일렀다.
"해진 갓을 아깝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 나로 하여금 갓도 없이 민둥 머리로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맞이하게 하는가?"
이에 그만 도둑도 미안해 하면서 그 갓을 되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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