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어머니의 병구환 때문에 벽파를 붙좇은 심환지
심환지(1730~1802)의 본관은 청송이고 자는 휘원, 호는 만포이다. 영조 38년(176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부조의 공덕으로 세자 익위사 부솔에 보임되고, 영조 47년(177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조 22년(1798)에 정승으로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헌이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으나 지조가 있어 교유를 아무렇게나 하지 않았다. 당시 임금의 장인이었던 오흥 부원군 김한구의 아들 참판 김귀주가 그와 교유를 맺고 싶어했으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그 무렵 심환지의 어머니가 편찮아서 피성의 의원을 데려다 진찰을 하였더니 그 의원이 이렇게 말하였다.
"산삼 한 근을 쓰지 않으면 병이 나을 수 없습니다."
심환지가 한창 가난에 찌들어 거친 음식도 이어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김귀주가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려 공금 1천금을 차용하여 피성 의원을 시켜 산삼을 사다가 치료하게 하면서 자신이 돈을 준 사실을 말하지 않도록 단단히 당부하였다. 그러자 피성 의원이 우선 산삼 몇 편을 사다가 심환지에게 주었더니 그가 놀랍게 여기고 기뻐함 산삼을 가져오게 된 자초지종을 묻자 그 의원이 이렇게 말하였다.
"마침 친족이 산삼을 캐어다 팔기에 몇 편을 샀으니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심환지가 매우 감사하게 여겼다. 이 때부터 그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있더니 마침내 회복되었다. 심환지가 그 의원의 은덕에 감격하여 조촐하게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대접하게 되었는데, 술을 마시는 중간에 그 의원이 말하였다.
"나 역시 가난한 의원입니다. 그런데 산삼 한 근 값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바로 진흙골 김 참판께서 당신이 가난하여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여 드리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나에게 돈을 주면서 산삼을 사도록 했던 것이다."
심환지가 아무 말도 않은 채 잠자코 있었지만 대단한 은덕을 입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일을 가지고 한 번도 찾아가서 사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 가난해서 염습하고 장례 치를 꺼리가 없어 울부짖기만 할 뿐이었다. 김귀주가 또 그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조문하게 하고 상사의 절차를 물어 모든 비용을 마련해주도록 하니, 경재와 비교할 정도로 제수가 풍족하므로 이를 보고 모두 빈정대었더니, 심환지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분에게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니 이런 도움을 받는다 하여 거리끼지 않는다."
김귀주가 이러한 일로 결사적인 힘을 얻게 된 것이었다. 풍은 조만영이 정승 김도희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오흥이 본래 깨끗하고 검소하였는데, 지금 금위영의 빚장부에 3천 금이나 되는 많은 빚이 적혀 있으니, 어찌 그렇게도 남용을 하였단 말이오?"
김도희가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남용한 것이 아니고 사우지간에 구휼하였기 때문이요."
김귀주가 이런 방법으로 당시의 명사들을 망라하여 벽파의 세력을 늘려 나갔으며, 심환지 역시 이때부터 김귀주를 붙좇아 뒷날 시파의 반대와 탄핵의 대상 인물이 되었다.
해흥군의 넋을 머리에 인 김이소
김이소(1735~1798)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유안, 호는 용암이다. 영조 40년(1764)에 문과에 합격, 정조 16년(1792)에 문과에 합격, 정조 16년(1792)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익헌이다. 동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손가참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밤중이 되어 비몽사몽간에 갑자기 한 재상이 나타났는데 옥으로 된 고리를 단 채로 서각으로 만든 띠를 두르고 늠름하게 방으로 들어오기에 김이소가 물었다.
"공은 뉘시오?" 그 재상이 대답하였다. "나는 해흥군(이련)이오." 김이소가 다시 물었다. "각하의 유해를 이미 고국으로 옮겨다 장례를 지냈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까?"
몇 해 전 해흥군이 동지사로 갔다가 이 손가참에서 객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흥군이 대답하였다.
"내가 뭇 귀신들에게 가로막힘을 당하여 산해관을 벗어날 수가 없소. 그래서 혼자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날마다 고국의 전원을 바라보니 만리나 되는 거리인 데다 산이 막혀 있어 자손들의 제사도 받을 수가 없다오. 그런데 다행히 각하를 만나게 되었소. 각하의 기개는 남들보다 뛰어나 귀신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터이니 나를 인도하여 산해관을 벗어나도록 해주겠소?" 김이소가 대답하였다. "제가 어떻게 산해관을 벗어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해흥군이 말하였다. "공의 기백은 모두 머리에 모여 있으니 나의 혼백이 공의 머리에 붙으면 나를 가로막는 귀신들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만 이곳과 산해관과의 거리는 하룻길이 넘으니, 공이 고통을 잘 견디러 신음하는 소리를 내지 않아야만 귀신이 범접을 못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귀신들에게 저지당하여 산해관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될 것이오."
김이소가 감히 거절하지도 못하고 억지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허락하고 새벽이 되어 출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머리에 큼 돌을 얹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들고 몸이 쑤시고 아파 고통을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억지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가마를 타고 산해관까지 이르나 마치 태산이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아야!' 하는 통성이 저절로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머리와 이마가 매우 홀가분하게 여겨지면서 곧바로 쑤시고 아픈 고통이 사라지므로, '아차!' 하고 수없이 후회하면서 돌아와 이 사실을 해흥군의 집안에 나타나기를 매우 신령하게 하고, 제사 때마다 의자에 앉아 제사 음식의 기를 마셨는데, 만일 불결함이 있으면 번번이 그 여종에게 벌을 내리므로 온 집안이 두렵게 여겨 조금이라도 게을리함이 없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그의 영험도 점점 줄어들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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