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3. 탕평과 선비들의 의리
원수에게 은인이 된 박문수
박문수(1691~1756)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성보, 호는 기은이다. 문과에 급제하였다. 영조 4년(1728) 무신란(이인좌의 난)에 종사광으로 나가 훈이등으로 공을 세워 영성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익이다.
일찍이 신임사화 때 이우당 조태채와 반대당이 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조금 수그러지자 영조가 화해시키기 위해 탕평론을 내놓고 대신들로 하여금 화합하게 하였다. 박문수가 한번은 금중에 입직하여 회식할 적에 반찬에 콩나물이 있자, 반드시 콩나물 머리를 잘라 버리고 먹으며 말하였다.
"콩나물의 머리를 잘라 버리지 않을 수 없다."
콩나물의 태채가 조태채의 태채와 음이 같기 때문에 조태채를 빗대어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조태채의 아들 조관빈도 또한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비록 서로 만나보지는 않으나 박문수가 평소 조태채의 충절을 흠모하여 조관빈에게 항상 은은한 정을 두고 있었다. 조관빈을 질투하는 자가 모함하여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하니 박문수가 그를 구원하고자 하여 주상에게 아뢰었다.
"조관빈이 아주 흉악한 죄가 있으니 죄는 진실로 참형에 해당합니다만, 지금 운운하는 이 일은 죽일 만한 죄가 아닙니다." 주상이 말하였다. "이는 네 원수가 아니냐?" 박문수가 아뢰었다. "사적으로는 원수이나 공적으로는 합당한 죄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조관빈을 꼭 죽이시려면, 신이 원수를 갚기 위해 청한 것으로 안팎에 포고하고 죽이소서."
주상이 이에 크게 감동하고 그를 사면하였다. 조관빈이 판서의 지위에 이르렀다가 갑자기 죽게 되자 박문수가 그 집에 가서 사람을 시켜 그 아들에게 일렀다.
"내가 존옹(상대방의 아버지)과 살아서는 원수지간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동료로서 옛 친분이 있으니 죽음에 임하여 어찌 일곡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에게 감히 청하네."
그 아들이 박문수가 곡하는 것을 허락하면서도 끝내 나와 맞이하지 않았다. 박문수는 몹시 섧게 울고 곡을 마치자 사람을 시켜 그 관을 뜰에 내어 관을 쪼개어 보려 하였다 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조관빈의 아들에게 고하니 그 아들이 말하였다.
"상관없다. 박공이 비록 서로 원수이기는 하나 반듯 우리 선인을 욕보이지는 않을 것이요, 응당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박문수가 이에 관을 쪼개어 위끝의 나무를 찍어내니 그 안에 낫 쇠끝이 있는데 길이가 한 치 남짓하였다. 무릇 나무를 찍을 적에 낫 쇠끝이 부러져 나무 속에 들어가서 세월이 오래된 것이었다. 박문수는 이에 목공을 불러 꾸짖었다.
"일국의 중신의 관을 네가 주의하지 않고 낫 쇠끝이 관의 나무 속에 들어가게 하였으니, 만년의 유택(무덤)에 어찌 후한이 되지 않겠느냐."
이에 관을 다시 짜서 장사 지냈다. 그 뒤로부터 두 집 자손이 비록 서로 만나 보지는 않으나 무릇 환난이 있으면 극력 도와 주었다 한다.
어영대장의 마부를 가둔 성균관 장의 서유망
서유망(1766~1813)의 본관은 달성이고 약봉 서성의 후손이다. 영조 때 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태학(성균관)의 장의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고사에 임금이 문묘에 참배할 적에 성균관의 의식 절차를 장의가 주관하였고, 백관이 하마비(관리는 말에서 내리라고 쓴 비석)가 있는 곳에 이르러 모두 말에서 내렸다. 그 때 어영대장 아무가 말이 뛰어 말고삐를 제어하지 못하여 하마비 안쪽 수십 보까지 넘어 들어갔다. 장의인 서유망이 관례에 의거하여 그 마부를 가두니, 어영대장이 책임을 느껴 군사를 아장에게 넘겨주고 이웃집에 물러나 있으면서 임금의 처분을 기다렸다. 이 일을 임금의 행렬을 인도하던 장수가 이 일을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도승지 서유문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어영대장이 본디 경솔하였지만 그 자리는 매우 중요한 자리다. 앞에 인도할 사람이 없을 수 없으며, 대장은 노상에서 임명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네가 서유망에게 가서 타일러 그 마부를 놓아주고 어영대장으로 하여금 그대로 직무를 봉행하게 하라."
서유문과 서유망과 4종형제간이었다. 서유문이 임금의 뜻을 사적으로 말하니, 서유망이 듣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수행하던 대신 서매수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경이 그에게 한마디 말을 해주게." 서매수가 아뢰었다. "이 사람은 신의 삼종질이나 천성이 강직하고, 또 관례에 비추어 법을 지키는데 신이 어찌 감히 강요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가서 말은 해보겠습니다."
서매수가 가니, 서유망이 화를 내어 말하였다.
"한 장의가 법을 집행한 것 때문에 승지와 대신이 서로 잇따라 임금의 뜻에 아첨해 따르니, 법을 시행할 수 없습니다. 장의직을 사양하겠습니다." 서매수가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내가 어지 그대에게 강요하겠는가. 다만 소회를 말했을 뿐이네. 지금 주상께서 명륜당에 임어하셨는데 그대가 어찌 사직할 수 있으랴."
서매수가 드디어 임금에게 아뢰어, 임금도 어찌할 수 없어서 좌상으로 하여금 어영대장의 직무를 임시 관장하게 하였다.
임금이 신하에게 농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송명흠
송명흠(1795~1768)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회가, 호는 역천이다. 동춘 송준길의 현손이다. 도암 이재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원이다.
영조 38년(1762) 곧 임오년을 당하여 뭇 소인들이 세자(사도세자)를 매우 다급하게 모해하여 장차 사사하려 하였다. 고사에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시임, 원임의 대신과 문무관 3품 이상 및 재야의 유현을 불러 전정에 모아 논의하게 하였다. 이때 모인 신하들은 모두 임금의 뜻에 따라 감히 직언을 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송명흠 만이 아뢰었다.
"걸주 같은 포악한 임금도 자식을 죽인 악행이 없었는데 전하께서 어찌 차마 그 자식을 죽이신단 말입니까?"
임금이 크게 노하여 드디어 내쫓아 버리고 선전관에게 칼을 주며 말하였다.
"네가 송명흠을 따라가서, 만일 도중에 남의 집에 들어가 숨거든 그 주인까지 아울러 죽여 버리고 만일 남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그 집네 돌아가거든 네가 가서 목을 베려 하되, 그가 목을 늘이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거든 목을 벨 필요가 없고 만일 변명함이 있거든 반드시 목을 베고 오라."
무릇 당파가 있음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송명흠은 이미 임금의 뜻을 알아채고 지팡이를 짚고 집에 돌아와서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선전관이 이르자, 송명흠이 말씨나 얼굴빛을 변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임금께서 신하에게 죽음을 내리시는데 어찌 감히 죽지 않겠는가. 가묘(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를 참배하고 오겠노라." 드디어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고, 임금이 신하에게 농담을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는 직신이다."
주상이 그를 아름답게 여기며 죄주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세자를 사사하여 뒤주 속에 넣어 죽도록 하였으니, 곧 임오년(영조 38년, 1762) 윤 5월 21일이었다. 세자의 아들 정조를 세손으로 삼으니, 뭇 소인들이 또 논쟁하여 말하였다.
"죄인(사도세자를 가리킴)의 아들을 종묘에 들어가게 할 수 없다."
정조가 이미 세손이 되어서 지극히 공경하고 지극히 효성스러우니, 뭇소인들의 참소를 면하게 되었다. 고종 16년(1879)에 왕명으로 신주를 영구히 종묘에 모시고 제사 지내게 하는 특전인 부조지전을 시행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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