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끝내 이름을 고치지 않은 정호
정호(1648~1736)의 본관은 연일이고 자는 중순, 호는 장암이다. 숙종 8년(1684)에 문과에 급제, 영조 1년(1725)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상이 되고 기로소에 들어 갔으며 시호는 문경이다.
급제하기 전 꿈에, 신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네 이름이 좋지 못하니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이름 글자에서 '물 수'와 '흰 백'을 떼어버리면 반드시 급제할 것이다." 정호는 꿈에서 깨어나 말하였다. "과거에 급제하고 급제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학문에 달려 있지, 이름에 달려 있겠느냐."
신인이 세 번 고하였으나 정호는 끝내 고치지 않았다. 끈질긴 노력 끝에 드디어 뒤에 과거에 올랐다.
집이 충주에 있었는데 나이 많고 할 일이 없어 배나무 수십 그루를 밭 사이에 심었다. 이 때 참판 이형좌가 도승지로 왕명을 받들고 정호를 부르러 왔다. 정호가 친히 배나무를 접목하는데 큰 나무가 한 자 남짓하였다. 이형좌가 빙긋이 웃으며 말하였다.
"이렇게 어린 나무가 언제 열매 맺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 때 정호의 나이 80세였으므로 그가 늙어서 그 배의 열매를 맛보지 못할 것임을 풍자한 것인데, 정호도 웃고 말았다. 뒤에 이형좌가 충청감사로 부임하여 정호를 찾아가니, 정호가 술상을 간단히 차리고 배 10여 개를 같이 내놓았는데 감미로운 맛이 특이하였다. 이형좌가 물었다.
"이 배는 참으로 맛이 좋은데 어디에서 구했습니까?" 정호가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연전에 내가 친히 접목한 것이네. 그대는 내가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라 근심했는데 지금 열매를 따먹은 지 이미 수년이 되었네."
정호는 나이 89세에 죽었다.
돈피갖옷을 벗어 정순왕후에게 바친 이사관
이사관(1705~1776)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숙빈, 호는 장음이다. 영조 13년 (1737)에 문과에 급제하고 48년(1772)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상에 이르고 시호는 효정이다.
영종의 계비 정순황후 김씨가 어릴 때 서산에 살았다. 지극히 가난하여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가 일찍이 친척의 집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이 때 돌림병이 크게 성하여 온 마을 이 모두 전염되자, 야외에 초막을 지어 피하였다. 정순왕후와 그의 모부인이 나가 피하였는데 정순왕후는 그 때 겨우 3세였다. 도깨비들이 정순왕후가 묵고 있는 초막 밖에 떼를 지어 와서 말하였다.
"곤전(왕비)이 임어하셨으니 시끄럽게 떠들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모두 흩어져 가므로 모부인이 사뭇 이상하게 여겼다.
영조 23년(1747) 정월, 정순왕후가 3세 때 김한구가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 때 이사관이 호서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하는 도중에 여관에서 만났는데 예전에 이미 서로 아는 처지였다.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매우 추운 날씨였다. 이사관이 김한구에게 말하였다.
"날씨가 이처럼 추운데 그대의 딸이 추위에 고생이 없을 수 있겠소."
그리고 드디어 돈피갖옷을 벗어 그에게 주었는데, 김한구가 그것을 매우 고맙게 여겨 항상 정순왕후에게 익히 들려주었다. 김한구가 서울에 와서는 남촌의 학주 김홍욱의 옛집에 우거하였다. 정순왕후가 15세 되는 영조 35년(1759)에 이르러 정성왕후의 상기가 이미 다하자, 영조가 친히 왕비감을 간택할 적에 사대부의 딸을 궁중에 모았는데, 정순왕후가 홀로 지정된 자리를 피하여 앉았다. 영조가 물었다.
"어찌하여 피해 앉는가?" 정순왕후가 대답하였다. "아비의 이름이 여기에 있는데 어찌 감히 그 자리에 앉겠습니까."
대개 왕비를 간택할 때 그 아버지의 이름을 방석 끝에 썼기 때문이다. 영조가 여러 처녀들에게 물었다.
"무엇이 가장 깊은고?"
그러자 어떤 처녀는 산이 깊다고 말하고, 어떤 처녀는 물이 깊다고 말하여 중론이 일치하지 않았는데, 정순황후는 홀로 말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주상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정순왕후는 대답하였다. "사물의 깊이는 헤아릴 수 있거니와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주상이 또 물었다. "무슨 꽃이 가장 좋은가?"
그러자 어떤 처녀는 복숭아꽃이 좋다고 말하고, 어떤 처녀는 모란꽃이 좋다고 말하고, 어떤 처녀는 해당화가 좋다고 말하여 대답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 때 정순왕후가 홀로 말하였다.
"목화(면화)가 가장 좋습니다." 주상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정순왕후는 대답하였다. "다른 꽃은 일시의 좋은 데 지나지 않고 오직 목화는 천하 사람에게 옷을 지어 입혀 따뜻하게 해주는 공이 있습니다." 이 때 마침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주상이 물었다. "월랑의 기왓골이 몇 줄인지 세어보아라."
처녀들이 모두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 넷 하며 세었으되, 정순왕후는 머리를 숙이고 침묵하고 앉아 있다가 줄 수를 말하였다. 주상이 물었다.
"어찌하여 기왓골이 몇 줄인 줄 아느냐?" 정순왕후가 대답하였다. "처마의 낙숫물을 세어 보았으므로 알았습니다." 주상이 깜짝 놀라며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그 이튿날 아침에 채색 무지개가 대궐로부터 일어나서 정순왕후의 세수하는 그릇에 꽂히니, 후비의 덕이 있다 하여 특별히 정궁으로 간택하였다. 장차 입궁하려 할 적에 여관(상궁)이 옷 치수를 재기 위하여 정순왕후에게 돌아앉기를 청하니, 정순왕후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너는 돌아앉을 수 없느냐?" 여관이 황공하게 여겼다. 정순왕후가 궁궐에 들어오게 되자, 주상이 말하였다. "옛날 후가 곤궁할 때 돌봐준 사람이 없었는가?' 정순왕후가 대답하였다. "옛날 정묘년(영조 23, 1747)에 서울로 들어오는 도중에 마침 극심한 추위를 만나 장차 동상을 입게 되었는데, 만일 이사관이라는 사람이 돈피갖옷을 벗어 주지 않았으면 지탱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영조가 그를 발탁해 썼는데 그 뒤 14년 만에 덕망이 높아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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