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대나무 찍은 뾰족한 끝을 분별하여 잃은 돈을 찾아준 고유
고유(1722~1779)의 본관은 개성이고 자는 순지, 호는 추담이다. 추담이 어렸을 때, 나무하는 아이가 땔나무를 하여 힘에 부쳐 젊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물을 띄워놓고 물 아래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가져가도록 할 만큼 영특하였다. 영조 17년(1741)에 생원이 되고, 19년(1743)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가 되었다. 영조 19년(1743)에 창녕 현감이 되었는데, 이 때 한 상인이 여점에서 자다가 그가 가지고 있던 조그마한 금덩이를 잃고 뒤를 추적하니 도둑이 대나무 울타리를 찍고 나갔다. 상인이 그런 사실을 고유에게 고하니, 고유는 말하였다.
"무릇 대나무를 찍는 자가 밖에서 찍었으면 그 뾰족한 끝이 밖에 있고, 안에서 찍었으면 그 뾰족한 끝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대나무의 뾰족한 끝이 과연 안에 있었다. 여점 주인을 잡아다가 한 차례 심문하여 승복받고 급을 상인에게 돌려주었다. 정조 3년(1779)에 안주의 임소에서 죽었다. 고유의 장인 김광제도 영조 19년 (1743)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사위 고유와 동방급제하였다.
담을 뛰어넘게 하여 폐세제 전교를 거두게 한 송인명
송인명(1689~1746)의 본관은 여산이고 자는 성빈, 호는 장밀헌이다. 숙종 39년 (1713)에 생원이 되고, 45년(1719)에 문과에 급제하고 영조 11년(1735)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헌이다. 소시에 집이 가난하여 비록 배를 채우지 못하였으나 태연하였다. 집이 양주에 있었고, 부모의 산소는 장단에 있었다. 하루는 묘지기 종이 와서 다급하게 고하였다.
"아무 댁에서 바야흐로 선친의 묘소 섬돌 아래에 투장(몰래 남의 산소 가까이 장사 지내는 것)하려 하는데 명일 묘시에 하관하게 되었답니다."
이른바 아무 댁은 당시 권세 있는 재상이었다. 송인명은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
"한 말 밥을 오늘 저녁에 마련할 수 있겠소?"
부인이, '좋습니다' 하고 곧 밥을 지어 올리자 송인명은 두 손으로 소금을 발라 뭉쳐서 입에 넣으니 조금 뒤에 한 말의 밥이 금새 다 없어졌다. 이에 부인이 비로소 송인명의 배가 큰 것을 알았으니, 대개 예전에는 가난하여 배고픔을 참았던 것이다. 식사를 끝내고는 곧바로 걸음을 재촉하여 도보로 도성에 들어가서 밤중이 되어 그 재종형인 판서 성명을 찾아가서 그 연유를 대강 말하니 성명이 다음과 같이 마지 못해 말하였다.
"여기에서 장단까지는 백여 리고 또 그 집안의 투장이 명일 아침에 있으니, 비단 권세도 미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찌 그 시간에 급히 당도할 수 있겠는가?" 이에 송인명이 대답하였다. "저에게 나름대로 계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파하여(통금해제)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곧 나가서 묘소 아래에 이르니, 먼동이 이미 밝았다. 그 재상이 막 하관하려 하고 장사에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송인명이 곧바로 상인의 앞에 당도하여 큰 소리로 꾸짖었다.
"무수한 청산에 어느 곳인들 장사 지낼 땅이 없어 피혐의 땅에 장사 지내려 한단 말인가?"
그러자 그 상가의 측근 사람들이 풍색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송인명을 포박하려 하였다. 송인명이 두 손으로 관을 들고 말하였다.
"만일 손대는 자가 있으면 곧 이 관을 때려 부숴버릴 것이다."
이어서 관을 들고 천천히 논으로 걸어 들어가니, 여러 사람들이 깜짝 놀라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 때 큰 비가 동이로 쏟아 붓듯이 내려 평지의 수심이 한 자 남짓하였다. 상인이 여러 종자들과 '아이고, 아이고' 호곡하며 진흙 수렁길로 관을 따라왔다. 송인명이 논 가운데 높고 조금 마른 듯한 곳에 이르러 그 옆의 마른나무를 뽑아 꺾어서 굄목을 만들고 그 위에 관을 놓아두고 말하였다.
"여기서 장사 지낼 만한 곳이오."
그리고 서서히 걸어서 돌아오니 그 재상이 그의 신력을 두려워하여 다른 곳에 옮겨 장사 지냈다.
신축, 임인년 정변에 조정에서 노론 사대신, 곧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유배시키고, 당시 당권파(소론)에서 마음대로 방자한 짓을 하여 이미 세제(영조)가 왕에게 문안하는 길을 끊어버리니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었고, 인원왕후(숙종 계비 김씨)는 온 조정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조정에 애통전지를 내렸는데, 소론측에서 비밀로 하고 반포하지 않으니 인원왕후도 어찌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세제가 핍박을 견디다 못하여 세제의 자리를 사양하고 물러나려 하니, 소론 일당이 거짓으로 간하여 말렸으나 역모는 더욱 급하게 움직였다. 하루는 김일경 등 소론 일당이 모두 주상의 앞에 이르러 바야흐로 '세제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글을 초하여 다음날 반포하려고 하였는데, 주상이 그만 정신이 혼수상태에 빠져 잠이 든 사이 이를 몰랐던 것이다. 이 때 환관 장세상이 그것을 보고 급히 달려가서 고하니, 세제가 그 말을 듣고는 주상에게 나아가 그 정상을 이루 다 아뢸 겨를이 없이 화가 매우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폐세제가 되면 죽게 되면 죽게 될 것이 뻔하므로 그만 독약 두 그릇을 만들어 손수 가지고 빈궁의 침실로 들어가서 서빈에게 울며 말하였다.
"지금 화가 목전에 임박하였소. 천안(임금)을 한번 뵙고 위급함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나아가 뵐 길이 없으니 명일에 화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 그 욕을 참고 저들의 손에 죽느니보다는 이 약을 마시고 스스로 죽는 것이 낫지 않겠소." 이에 빈이 울며 대답하였다. "주상이 어질고 우애로우시나 병환에 계신 까닭으로 역적 무리들이 이와 같이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지금 만일 이 약을 마시고 함께 죽는다면 이 무리들이 장차 죽은 뒤에 또 무슨 악명으로 가할지 모르오니, 이러한 사정을 자전(숙종 계비 김씨)께 다 아뢰느니만 못합니다. 만일 자전께서 어여삐 여겨서 구해주시면 다행이고, 만일 힘이 미치지 못하면 그 때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세제가 그 말을 따라 앉아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드디어 빈과 샛길로 나서려는 때 송인명이 설서로 숙직을 하다가 그 사실을 알고 나아가 아뢰었다.
"아침저녁 문안하는 길에 복병이 있다 하는, 동궁의 작은 담을 넘으소서, 작은 담을 넘으면 바로 자전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영조가 그 말을 따라 빈과 청휘문에 이르니, 문이 과연 닫혀 있었다. 드디어 담을 뛰어넘으려 하였으나 담이 높아 자신의 힘으로는 넘을 수가 없었다. 송인명은 팔힘이 뛰어나서 급히 두 손으로 세제와 빈을 떠받들자 비로소 담을 넘어설 수 있었다. 세제가 담에 기대어 물었다.
"네가 어떻게 담을 넘으면 자전이 계심을 알겠느냐?" 송인명이 황공하게 아뢰었다. "신의 아비가 호조낭관으로 궁궐을 수리하였는데 신이 어릴 때 아비를 따라 이곳에 왔으므로 궁정을 자세히 압니다."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송인명이 급제하기 전 꿈에, 어떤 사람이 붉은 옷을 가지고 다섯 가지 채색 무지개를 타고 하늘을 오르려다가 반공에 이르러 앞으로 떨어지려 하기에 급히 손으로 받들어 올리니 이에 훌쩍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꿈을 깨고 나서 이상히 여겼는데 이 때 와서야 그 꿈의 뜻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 때 자전이 새벽에 일어나서 머리를 빗다가 세제와 빈이 오는 것을 보고 손으로 머리털을 움켜잡고 머리 빗는 일을 정지하고 분부하였다.
"그대들이 어찌하여 이처럼 일찍 오는가?"
빈이 앞에 나아가 울며 세제가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려 한 정상을 고하며 아뢰었다.
"화가 촌각에 달려 있어 마마께 고하고 물러가 죽으려 합니다."
자전이 깜짝 놀라 빗을 던져버리고 불끈 성을 내며 분부하였다.
"이 무리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나는 막연히 알지 못하였다."
머리를 미쳐 다 빗어 올리지도 못한 채 일어나 신도 신지 않고 전정에 걸어 내려가서 세제에게 명하여 앞에 인도하여 가니, 궁인이 급히 대비(숙종 계비 김씨)를 받들어 업었다. 그러나 대조전에 이르니, 문이 다 닫혀 있고 안에서 어떤 사람이 비밀히 속삭이는 말이 들렸다. 세제가 문을 흔드니 문고리가 저절로 열렸다. 드디어 대비를 받들어 안으로 들어서는데, 환관 박상검이 홍수(궁녀)의 무리들과 창 앞에서 전교를 비망지에 쓰다가 갑자기 세제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에 무리들이 깜짝 놀라 급히 비망지를 거두어 뛰쳐나가 섬돌을 맴돌며 달아나는데, 세제가 펄쩍 뛰어 옷소매를 잡아 그 종이를 빼앗으니 박상검이 한사코 놓으려 하지 않아서 각각 한쪽 끝을 잡고 당기니, 종이는 한가운데가 찢어지고 박상검은 그만 몸을 뿌리치고 달아나버렸다. 세제가 그 전교의 반쪽을 보니, '제위서인(제를 서인으로 삼는다')'이라는 네 글자가 있었으니, 대개 세제를 폐하여 서인으로 한다는 전지였던 것이다.
대비가 이를 보고는 크게 노하여 약방에 일러 언문 전교를 내렸다.
"이달 초엿새 이후의 일은 모두 대전의 처분이 아니고 두 환관이 병약한 주상의 왕명을 사칭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번 조정의 관료를 유배하는 일은 오로지 대전의 장번내관(늘 모시는 내관) 박상검, 승전색 문유도, 대전상궁 필정, 석열 등이 결탁하여 번갈아 올린 데서 나온 것으로 나라를 위태롭게 할 뻔하였고, 나와 세제를 외롭고 위태롭게 한 정상은 천만 번 몹시 통분하다...."
이 날 세제(영조)가 화를 면하게 된 것은 대체로 송인명의 도움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다.
선정을 펴 삼한을 이룬 최규서
최규서(1650~1735)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문숙, 호는 간재 또는 소릉이다. 현종 10년(1669)에 진사가 되고 숙종 6년(1680)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내고, 경종 1년(1721)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상에 이르고 기로소에 들어가 벼슬을 그만두었다. 영조 4년(1728) 무신란 때 주상이 그에게, '한 올의 실로 나라를 부호하였다'라는 친서를 하사하였다. 나이 81세에 죽었으며, 시호는 문충이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전라 감사로 있을 때 명곡 최석정이 그 지역 사람에게 그의 정사에 대해 물으니, 다음과 같이 그가 조용한 가운데 선정을 펴고 있음을 일러주었다.
"특별히 다른 일은 없고 오직 세 가지 한가로운, 즉 삼한으로 일컬을 뿐이니 주부들의 부서가 한가롭고, 공방이 한가롭고, 기방과 풍악이 한가로운 것을 말합니다."
최규서는 일찍이 말하였다.
"소시에 길에서 여인을 만나 한번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눈을 감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마음이 장차 나를 죽이게 되는구나'하고 두 번 세 번 생각하였다."
최규서가 사리사욕을 이겨내는 극기공부는 젊었을 때부터 이와 같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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