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관상을 보면 기이하게 들어맞는 - 김창흡
김창흡(1653~1722)의 자는 자익이고 호는 삼연이다. 몽와 김창집의 아우다. 현종, 숙종, 경종의 세 왕조를 섬겼는데 덕업과 명절로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 이후 명산을 두루 유람하면서 장사꾼과도 어울려 다녔다. 설악산으로 들어가려는 도중에 소낙비를 만났다. 잠시 바위 밑에서 쉬는데 그곳에는 한 노인이 먼저 와서 앉아 있고 중 한 사람이 자고 있었다. 김창흡은 시상이 호연히 일어나서 흥얼흥얼 읊조려 마지 않았다. 노인이 말하였다.
"서생은 무슨 좋은 시구가 있기에 기쁨이 얼굴에 나타나는가?" 그러자 김창흡이 말하였다. "노인이 만일 시를 안다면 내가 그 시구를 말하리다." 이어서 시를 읊었다.
선산을 한번 보는 것이 분수에 없음을 알겠거니 가을비 쓸쓸히 내려 짐짓 마가 되었네
"이 어찌 아름답지 않소." 김창흡이 말하니, 노인이 대답하였다. "시구가 사뭇 아름답기는 하나, '알다'의 '지'자는 온당하지 못하다." 이에 김창흡이 말하였다. "생각해 봐도 그보다 나은 다른 글자가 없었소." 노인이 말하였다. "시험 삼아 '아니다'의 '비'지로 쓰면 이미 유원하고 뜻도 심후하다." 그러자 김창흡이 깜짝 놀라 말하였다. "당신이 이미 시를 아니 반드시 아름다운 시구가 있을 것이므로 외어줄 수 있겠소?" 노인이 말하였다. "비가 이미 그쳤고 갈길이 또한 바쁘니 길게 이야기할 수가 없소. 저 중이 시에 매우 능하니 그와 더불어 담론하도록 하오." 곧 옷을 떨치고 떠나버렸다.
김창흡이 자고 있는 중을 불러 일으켜 말하였다.
"그대는 시에 능하다 하니 듣기를 청하오." 중이 말하였다. "서생이 이처럼 굳이 요구하니, 서생을 위해 한 수 읊겠소." 중은 다음과 같이 읊고 곧 떠나갔다.
늙은 중은 바랑을 베고 누워 금강산 길을 꿈속에 누비는데 쓸쓸히 뚝뚝 잎지는 소리에 해지는 가을 하늘에 놀라 깨었네
김창흡은 그 시에 감탄하면서 외우고 또 외었다.
삼연이 사람의 상을 보면 이따금 신기하게 그 사람의 신수를 맞히곤 하였다. 마전군수 정야가 김창흡과 봄을 찾아 풍계의 깊숙한 곳에 이르러 풀을 깔고 한담을 나누었는데, 이 때 김창흡이 말하였다.
"우리 형제 중에 나와 내 아우들은 모두 운명이 곤궁하니 말할 거리도 못되거니와 둘째형(김창협을 일컬음)은 평소 문명을 날렸고, 새로 문과에 급제하여 앞길이 확 트이니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그 골상이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없고 정력이 부족하고 약하여 큰 그릇은 못 된다. 우리 백형(김창집을 일컬음)은 음덕의 길로 진출하여 세상 사람들이 모두 평범한 인물로 보나 실은 참으로 대신의 그릇이다. 하는 바의 모든 일이 섬세하고 민첩하여 우리 형제 중에 제일일 뿐만 아니라 훗날 찾아봐도 형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후일 내 말을 마땅히 믿게 될 것이다. 다만, 위세를 부리면 험난한 일을 많이 만나 마침내 어떻게 될지 모를 뿐이다."
훗날 그의 말이 그대로 맞았다. 김창흡의 벼슬은 진선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강이다.
거짓말을 한 아전을 도와준 - 조태채
조태채(1680~1722)의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유량, 호는 이우당이다. 숙종 12년 (1686)에 문과에 급제하고, 43년(1717)에 우의정까지 이르렀다. 조태채가 부인 심씨의 상을 당하여 슬픔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한성판윤으로서 마침 공무가 있어 새벽에 일어나서 한성부의 아전이 와서 청하기를 기다렸으나, 그림자조차 나타나지 않고 해가 돋을 때까지라도 오지 않았다. 조태채가 크게 노하여 곧 공청에 나아가서 해당 아전을 잡아들여 장차 곤장을 치려 하자 아전이 울며 대답하였다.
"소인이 아주 슬픈 사정이 있으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조태채가 노여움을 참고 물었다. "네가 할 말이 무엇이냐?" 아전이 대답하였다. "소인이 아내를 잃었는데 집에 어린 자식 셋이 있습니다. 맏자식은 나이 5세이고, 둘째 자식은 겨우 3세이며, 딸 하나는 태어난 지 이제 막 6개월이 되었습니다. 소인이 그 어미의 일을 겸하여 양육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려는데, 어린 딸이 어찌나 울어대는지, 이웃집 여자를 청하여 젖을 먹였습니다. 조금 뒤에 둘째 자식이 또 배고프다고 울부짖어 소인이 돈으로 죽을 사서 먹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는 사이에 자연 때가 늦었습니다. 소인이 이미 공적인 일을 알고 또 대감의 위엄을 알고 있는데, 어찌 감히 고의로 죄를 범하겠습니까?"
조태채는 그 말을 듣고 슬프게 여겨 눈물을 닦으며 말하였다.
"네 사정이 나와 흡사하다."
조태채는 아전을 곧바로 석방하고 쌀과 베를 넉넉히 주어 자식 양육하는 데 크게 보태 쓰도록 하였다. 그 아전은 상처를 한 적도 없으며 다만 조태채의 사정을 알고 짐짓 거짓말을 꾸며 죄를 면하고 도움을 얻었던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군자는 속을 수 있는 방법으로 속인다'는 것이다.
홍동석은 조태채의 하인으로 선혜청의 서리로 있었다. 경종 12년(1721~22)에 소론의 대관이 조태채를 비방하는 계를 내어 짐짓 홍동석을 시켜 쓰게 하였다. 홍동석이 붓을 던지며 말하였다.
"자식이 그 아버지의 죄를 손수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인이 상전에게는 부자의 의리와 같습니다. 소인은 이 계사를 쓸 수 없습니다."
모든 대관이 노하여 그를 하옥시키고 매우 혹독한 형벌을 주었으나, 홍동석은 끝내 쓰지 않았다. 조태채가 제주로 유배되자 홍동석은 아전의 직을 사퇴하고 따라갔다. 조태채에게 사사의 명이 내려질 무렵에 조태채의 둘째 아들 회헌 조관빈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유배지로부터 30리 거리에 와서 미처 당도하지 못하였는데, 금부도사가 먼저 와서 약사발을 올리고 조태채에게 사약을 마시라고 재촉하였다. 홍동석이 옆에서 금부도사에게 청하였다.
"죄인의 아들이 오래지 않아 당도한다 하니, 시간을 조금만 연기하여 부자가 마지막 상면하도록 하소서."
금부도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홍동석이 그만 약사발을 차서 엎어버리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사색이 되었다. 도사가 부득이하여 '약사발이 바닷물에 떠내려 갔다.'고 계를 지어 올렸고, 그 사이에 조관빈이 당도하였다. 의금부에서 약사발을 다시 보내는 데 한 달 남짓 걸렸는데 사약을 받아 죽을 때 조태채가 조관빈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동석을 너는 동기로 보아야 한다."
홍동석은 조태채의 상을 따라 올라와서 다시 선혜청의 아전이 되어 대대로 세습하고 그 자손은 조씨 가문에 출입하며 사이좋게 지냈다. 조태채가 제주의 적소에 있을 때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등 3대신이 화를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선조의 세 원로 재상이 원통한 눈물 흘리시니 한밤중에 슬피 노래하는 한 외로운 신하 있네
이 시가 도성에 흘러 들어가자 반대파 소론 사람들이 더욱 미워하여 마침내 사사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이른바 노론 사대신의 한 사람이고, 시호는 충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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