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1604~1684)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자공, 호는 백곡 또는 귀석산인이다. 감사 김치의 아들이다. 현종 3년(166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가선대부에 올라 안풍군으로 습봉되었다. 81세에 화적을 만나 부상을 입고 상처로 죽었다. 글재주가 워낙 둔하여 글을 읽을 땐 언제나 남보다 배를 읽어야 했다 한퇴지와 유종원의 글을 골라서 1만여 번을 읽었으며, 그 중에도 백이전을 더욱 좋아하여 1억 1만 3천 번(당시 1만을 1억이라고 하였음)을 읽었으므로 드디어 자기의 서실을 억만재라고 이름하였다. 현종 11년(1670)에 조선 팔도에 흉년이 들고 이듬해 역질이 만연하여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런 와중에도 다음과 같이 농담을 하는 자가 이었다.
"금년에 죽은 사람의 수와 자네가 글 읽은 수를 견주어 보면 어느 것이 많겠나?" 시재가 있어 좋은 시를 많이 남겼다. 절구 몇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충청도길이 끝이 나자 경기도 길로 접어드니 가도 가도 길은 멀어 잠시도 쉴 수 없네 나귀등에 앉아 졸다가 잠이 깨어 바라보니 저녁 나절에 잔설이 남아 있는 저 산 이름이 무엇이더냐
해는 뉘엇뉘엇 갯벌 너머로 지고 새들은 둥지를 찾아 멀리 날아가네 석양판 느즈막히 나귀탄 저 나그네 앞산에 비묻어올까봐 마음이 조급하네
저녁 노을은 강모래에 내려앉고 가을 소리는 숲에서 울려오는데 소를 몰고 돌아온 목동의 옷이 앞산에 내린 비에 촉촉히 젖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