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중(1628~1692)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대수, 호는 노봉이다. 인조 27년(1649) 정시문과에 장원하였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당시의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던 강빈의 일(소현 세자빈이었던 강씨에게 세자를 죽였다는 무고로 사약을 내린 사건)을 거론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충성을 알고 있는 숙종은 그에게 죄를 주지 않았다. 민정중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로부터 땀이 나는 불상이 있다는 부고 가 올라왔다. 민정중은 민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즉시 그 불상을 부수게 하였다. 민정중이 대사간이 된 뒤에 절 두 채를 헐고 그 재목으로 태학 제사(성균관의 동재와 서재)를 짓게 하였다. 민정중은 아우 민여양과 더불어 우애가 남달랐고 형제가 모두 술을 좋아하였다.
그의 아버지 민광훈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형제가 다 아버지를 뵈러 와서 달포 동안을 함께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동안에 형제에게 경사스런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민정중에겐 이조 정랑 벼슬이, 아우에겐 부제학이란 교지가 같은 날 내려온 것이다. 평소 아들들에게 술을 엄금하던 아버지 민광훈도 이 날만은 술마시기를 허락하였다. 두 형제는 오래 참아 왔던 목마름을 술로 풀다 보니 자연 정도가 넘게 되었다. 취한 뒤에도 계속 술을 더 가지고 오라고 하자 하인들은 아버지 민광훈의 분부라며 이제 더 이상은 주지 못하겠다고 거부하였다. 만취한 형제는 고함을 벼락같이 질렀다.
"너의 순상(감사, 곧 아버지인 민광훈을 말함)이 암행어사 대접을 이렇게 밖에 못한단 말이냐, 응? 술 더 가져와라. 술!"
두 형제는 술주정을 실컷 부리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튿날 술에서 깨어난 형제는 지난밤의 실수를 듣고 깜짝 놀라 아버지 민 감사의 방문 앞으로 달려가 석고대죄 하였는데 그렇게 엄하던 민 감사도 웃기만 하고 꾸짖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