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길(1606~1672)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명보, 호는 동춘당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인조 2년(1624)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우복 정경세의 딸에게 장가 들어 우복의 사랑을 받았다. 1630년에 세마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665년에 대사헌이 되고 또 원자보양관이 되었다. 이웃집에 한 벼슬아치가 살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꿈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사람이 산구를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인인데 이 산구를 송씨 집에 전하려고 내려왔노라'고 하더라."
어릴 적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어쩌다 선생이 무슨 일로 그 날 공부를 가르치지 못하게 되면 송준길이 오히려 선생에게 가르쳐달라고 청하였으며, 그 날 공부를 못하게 되면 밤중이라도 반드시 배우고서야 잠을 잤다고 한다. 또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글씨로 이름이 있는 죽창 이시직이 그의 글씨를 보고, '네 글씨는 이미 나보다 낫다'고 극구 칭찬하였는데 이 때 준길의 나이 열 살 정도밖에 안 된 때였다. 사계 김장생에게 "소학"과 "가례 고증"등을 배웠다. 숙종 13년(1687)에 아버지 상을 당했는데 법도에 맞게 상례를 치러 칭찬을 들었으며, 혹 예에 대하여 조그만 의문이 있어도 반드시 스승인 김장생에게 물었으므로, 앞으로 예학에 대가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효종이 이원(여승방) 두 채를 헐자 이를 축하하고 또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옛날 주자도 절을 헐어 서당을 지으면 일거양득이라서 좋다고 하였습니다. 뜯은 헌 재목과 기와로 북학 서당을 지으면 좋겠습니다." 효종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성균관의 동재와 서재를 지었다. 67세를 살았고 시호는 문정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