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적(?~?)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여거, 호는 묵재 또는 휴옹이다. 인조 11년(1633)에 진사시를 거쳐 163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부수찬을 지낸 뒤 평안 감사를 두 번 역임하고 북경에 세 차례나 다녀왔으며, 1671년엔 영의정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숙종 6년(1680), 서자인 견이 역모로 사형되자 허적은 성 밖에 나가 왕명을 기다렸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권하였다.
"이제 공은 체포되어 죽는 것이 시간문제이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이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자식을 잘못 두었으니 국법에 따라 연좌되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극형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죽는다면 이것은 임금의 명을 공경함이 아니다."
한숨을 돌린 다음 허적은 계속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적에 길에서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 복장이 너무 사치하여 상인의 신분에 맞지 않기에 잡아 가두고 그 죄를 물었다. 구 뒤에 웬 여자가 와서 욕지거리를 한다기에 그 여인을 가두고 보니 그 연인은 바로 청년의 아내였고 복색 역시 사치스러웠으므로 두 남녀를 모두 곤장을 심하게 때리도록 하였더니 남녀가 다 장살되고 만 일이 있었지. 우리 아이 견이 태어나던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네. '몇 년 전에 청년 부부를 장살한 적이 없느냐? 나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어찌 법을 알 리 있겠느냐? 반드시 죄를 주어야 될 입장이라면 차라리 그의 부모를 벌했어야 마땅한 일이 아니냐? 남의 외동아들과 외동딸을 한꺼번에 죽이다니! 그러고도 어찌 복 받기를 바라느냐? 하늘이 너에게 벌을 내리려고 못된 자식 하나를 주어 너의 집을 망치게 할 것이니 너는 그렇게 알라!' 이런 나쁜 꿈을 꾸고 난 나는 처음에 아이를 기르지 않으려고 하다가 다시 생각하니 허왕한 꿈을 믿고 그렇게 할 수야 없지 않는가 하여 그럭저럭 오늘까지 온 것이다 오늘 당하는 이런 재앙은 다 내가 이미 지은 업보로 받은 것인데 누구를 원망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