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휘(1617~1669)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군미, 호는 춘천이다. 인조 11년(1633)에 진사가 되고, 22년(1641) 정시문과에 아우인 이경억(1620~1673)과 함께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들 형제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이시발은 태양 두 개가 떠오르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이경휘가 6세 때 "항우전"을 애독하였다. 이시발이 이경휘에게 나와서 감사에게 절을 하라고 시키자 이경휘는, '제가 들으니 감사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포악한 사람에게 어떻게 절을 할 수 있습니까' 하며 거절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경휘가 이조 함의로 있을 때의 일이다. 현종이 의관으로 있는 양제신을 지방 수령으로 보내라는 명을 내렸으나 듣지 않았다. 현종이 정청(인사권을 가진 병조나 이조의 관원들이 집무하는 궐내의 사무실)에 다음과 같이 힐문하였다.
"양제신을 수령으로 의망(관원 임명시 이조, 병조에서 세 명의 후보자를 추천하던 일)하라고 명한 지가 언제인데 지금까지 의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이경휘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의관이 수령에 제수되는 일은 전례에 없는 일입니다. 어명은 이미 받았으나 감히 그 명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화가 난 현종은 이경휘의 직을 갈고 양제신은 양천 현감으로 제수하였다. 언젠가 현종은 정승 정태화에게 이경휘 형제 중 누가 더 나으냐고 물었다. 이 때 정태화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들 형제는 난형난제라 누가 더 나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현종은 말하였다. "내가 보기엔 이경휘가 장자 재목이다. 이상진(우의정을 역임, 청백리에 뽑힘)이 전에 그의 막료로 있을 적에 자신의 진가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때였는데 이경휘만은 알아보고 많은 다른 추천을 배제하고 그를 적극 천거한 것을 보았다."
이경휘의 추천을 받은 이상진은 뒤에 명재상이 되었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이경휘의 안목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