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령(?~?)은 종실로써 바둑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국수의 호칭을 얻었다. 하루 어떤 사람이 마당에 말고삐를 매고 있었다. 덕원이 누구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저는 번을 서려고 올라온 향군입니다. 저도 바둑을 무척 좋아합니다. 나으리께서 국수라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물리치지 마치고 한번 대국해 주시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덕원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주니 그 사람은 덕원에게 조건을 제시하였다.
"대국에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만약 나으리가 지면 소인에게 봄철 양식을 대주시고, 소인이 지면 저기 마당에 매어 둔 말을 나으리께 바치겠습니다."
덕원도 그가 제시한 내기 조건을 쾌히 수락하였다. 첫번째 대국에서 덕원이 한 점을 이기고 두번째 대국에서도 또 한 점을 이겼다. 그 사람은 군말 없이 자기의 말을 내놓았다. 덕원은 그 말을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약속 이행이라 하지만 명색이 국수라 불리는 고수가 하수에게 말을 받는다는 것이 체면이나 자존심에 걸리기 때문이다. 덕원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농담으로 한 약속이니 그 말을 받을 수 없네."
덕원이 받기를 꺼려했지만 그 사람은 정색을 하며 고집하였다.
"나으리께 소인이 감히 식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끝내 고집하고 자기의 말을 두고 떠나갔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갔다. 어느 날 그 사람은 다시 와서 또 내기 바둑을 간청하였다. 덕원은 할 수 없이 대국을 시작하였는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두었지만 그의 수를 알 도리가 없었다. 불계패를 당하고 말았다. 바둑은 졌지만 영문이나 알고 싶어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라고 청하니 그는 죄송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저는 저 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나 제가 번을 서는 동안 저 말을 먹여 줄 데 가 없어 결국 제 말은 굶어 죽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소인은 그 말을 살릴 욕심으로 조그만 바둑 재능으로써 감히 나으리를 기만하게 된 것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