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원(1593~1662)의 본관은 청송이고 자는 원지, 호는 만사다. 광해 3년(161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장원을 한 이영구가 재생(성균관이나 향교에서 숙식을 하며 학업을 닦던 유생)들을 협박하여 인목대비 폐비를 주장하려는 음모를 미리 알아차리고 고향 영천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대북의 영수인 이이첨과는 절친한 관계였으나 인목대비 폐위의 일엔 결코 찬동하지 않았기 대문이다. 이 때 수몽 정엽 역시 벼슬에서 물러나 한마을에 은거하던 중이었다. 정엽은 그를 한번 만나 보자 즉시 마음을 허락하는 친분을 맺게 되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날 밤에 심지원은 정엽과 더불어 언덕에 올라가서 서울 쪽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불빛이 온통 하늘을 뒤덮자 심지원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탄식하였다.
"우리 임금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이 때 정엽은 약간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대의 충의가 이렇게 돈독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그 뒤에 심지원이 남상(홍문관 정자(정9품의 벼슬)의 별칭)으로 천거되었는데 사실은 정엽의 추천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심지원은 자제들을 모아 놓고 당부하였다.
"내가 홍문관 교리로 있을 적에 동료의 집에 놀러 간 일이 있는데, 그 친구의 책상 위에 달력 백 부가 쌓여 있는 것을 보자 미처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수십 수를 얼른 집어 내 소매 속에 집어넣고는 친구를 보고 '이 달력을 갖고 가서 마을 사람들이 달라고 하면 주어야지' 하고 얼떨결에 이야기하였더니, 그 친구는 얼굴이 상기 된 채 어떨 줄 몰라 했다. 아마도 안 된다고 즉시 빼앗기도 난처하고 그렇다고 그냥 빼앗기기도 아깝고 한 그런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실은 그 때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로 책상 위에 내려놓기도 어렵고 그대로 갖고 가지도 어려워 실로 난감한 순간을 겪어야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서 식은 땀이 날 지경이란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나는 남이 주지 않는 물건은 절대로 갖는 일이 없었다. 너희들도 내가 겪은 이 일을 거울 삼아 행동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