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1499-1576)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항지, 호는 일재이다. 타고난 기상과 용력이 범상하지 않아, 어려서부터 장난할 때에 동리 아이들이 겁을 내어 굴복하였다. 자라서는 놀기를 좋아하며 협기가 있어 만 리를 달리려는 뜻이 있었고, 씨름, 활쏘기, 말타기에서는 한 패의 으뜸이어서 억센 적과 주인을 배반한 종이 있으면 반드시 가서 그들을 눌러 이겼다. 무과 준비를 하면서 남치조, 남치근, 민응서같은 무리와 서로 어울려 따르니 사람들이 미치광이로 지목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비상한 사람임을 아는 이가 있었다. 어느 날 달이 휘영청 밝은 깊은 밤에 남대문에 올라가 기와가 덮인 처마 끝부분을 잡고 나는 듯이 몇 바퀴 돌기도 하였다.
하루는 그의 친구 남씨가 과실로 사람을 죽여 의금부의 관원이 시체를 검사하는데, 이항이 주위의 사람들을 헤치고 시체를 조사하고 있는 가운데로 느닷없이 들어가 시체를 움켜쥐고 나는 듯이 달아나 강물에 던져 버리고 그날로 비호같이 달려 전라도 관찰사를 찾아가 뵙고서그날에 서울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하였다. 한편 시체를 조사하던 관원은 갑자기 시체를 잃어버리고 그것이 이 아무개가 한 짓임을 들어서 알고는 호남에다 파발을 띄워 체포하도록 요청하였다.
"이항은 그날 전라도 감영에 있었다"
전라도 관찰사가 이렇게 회보하여 이항과 연루된 자들이 모두 모면할 수 있었다. 대체로 그의 뛰어난 용맹이 이와 같았다. 30세 이르러 그의 백부가 경계하는 말을 듣고 즉시 뉘우치며반성하여 그 자리에서 같이 어울리던 무리들과 사절하였다. 그리고는 '대학'을 소매 속에 넣고 도봉산 망월암으로 가서 마음을 단단히 하고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마침내 큰 유학자가 되었다. 그 뒤 남명 조식, 퇴계 이황과 함께 언관으로 훌륭한 계책을 진언한 것이 많았다. 임금이 진언하는 것마다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고 차례를 뛰어넘어 임천군수에 임명하자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장령에 임명하여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