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우(1496-1545)의 본관은 상주이고, 자는 국이, 호는 혁재 또는 잠소당이라 하였다. 중종 14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6년 뒤에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박광우의 어머니 장씨가 네 아들을 기르면서 한결같이 예제를 따라 서실 세 칸을 짓고, 별도로 길다란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밤낮으로 형제가 함께 거처하도록 하였다. 또 한 벌의 옷과 한 개의 갓으로 손님이 오면 교대로 착용하고서 영접하고 전송하게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막으니, 여러 아들들도 그와 같은 어머니의 교훈에 감동하여 학문과 덕행이 성취되었다.
박광우는 더욱 어린 나이로 빛나는 재주를 발휘하여 오로지 성리학 연구를 일삼았다. 정암 조광조가 맹자 어머니와 같은 가르침을 다시 보겠다고 자주 칭송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박광우가 대궐 뜰에 들어가 울부짖으니, 임금이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박광우가 상처를 입어 피가 흐르자 옷을 찢어 머리를 동여매고 의정부 행랑에 나와 앉았으니 도성 안 방리(행정 구역)의 약도(향약 회원)들이 원통함을 풀어 달라는 소를 올리려고 박광우에게 글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는 자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참판 이해와 김노는 모두 나이가 젊고 글씨를 잘 썼으므로 박광우가 두 사람에게 종이를 앞에 놓고 붓을 잡게 한 다음 좌우로 글을 불러 대는데 문장이 샘물이 솟는 듯하여 이해와 김노가 미처 받아쓰지 못하였으며, 같은 시간에 지은 것이 10여 건이나 되었지만 문장 내용이 간절하였다. 그 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박광우가 사간으로서 논쟁하기를 그치지 않아 잡아다 옥에 가두었다. 그가 범죄 사실을 진술한 것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곤장 크기가 넓적다리만하니 오늘 목숨이 다할 것이다. 어진 삶을 구하다가 어진 삶을 얻었으니 또 누구를 원망하며 탓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