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춘(1513-1577)의 본관은 선산이고, 자는 인중, 호는 미암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총명하여 처음 글을 배울 적에 눈에 한번 거치면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였다. 신재 최산두의 가르침을 받았다. 모재 김안국의 문하에 종유하였는데, 모재가 그를 공경하여 제자로 대우하지 않았다. 중종 33년(1538)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춘방과 홍문관의 관원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 때에는 정언의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죄가 추가되어 처음에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지는 길이었다. 뱃길이 험하여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일어 함께 가던 세 척의 배가 모두 침몰되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슬피 울먹였지만 유희춘은 얼굴빛이 태연하였다. 종성에서 19년 동안 있었는데 어려운 생활 속에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만 권의 책을 모두 읽고 '속몽구'를 지어 배우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의 부인 또한 문장에 능숙하였다. 혼자서 머나먼 길을 걸어 종성으로 남편을 따라올 때에 마천령을 지나게 되자 시를 읊었다.
걷고 또 걸어 드디어 마천령에 이르니 끝이 없는 동해가 거울처럼 평평하구려 머나먼 길 아녀자가 무슨 일로 왔던고 삼종의 의리는 중하고 나 한 몸은 가벼워서이네
이 시를 보면 성정의 올바름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선조가 처음 왕위에 올라 유희춘을 불러다 대사성에 임명하였으며,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