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건(1494-1567)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자발, 호는 점재 또는 휴수라고도 하였다. 중종 8년(151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이문건은 그의 중형 눌재 이충건과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그러다가 조광조가 화를 당하게 되자 당시의 인사들이 겁에 질려 감히 조문조차 못하였지만 이문건은 그의 중형 및 문하생 한 사람과 같이 가서 조광조의 장례를 의식대로 지냈다. 그리고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에 이문건이 가까이서 오래도록 모셨으므로 가장 후한 예우를 받았으며, 어찰과 갓끈을 내려 주면서 총애하였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문건이 빈전도감의 집례관으로서 명정과 시책 그리고 신주의 글씨를 모두 썼는데, 그의 전서는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그 뒤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에 승지로서 공신명부에 기록되었다가 뒤에 조카인 수찬 이휘의 화에 연좌되어 성주로 귀양갔다. 그곳에서 퇴계, 남명, 율곡 등 여러 선생들과 주고받은 글이 매우 많다. 이문건이 운명할 무렵에 족보를 만들어 자손들의 이름을 미리 지어 놓았는데, 10여 대에 이르도록 적손과 지손으로 더러는 많기도 하고 더러는 적기도 하며 더러는 없기도 한 것이 한결같이 미리 만들어둔 족보와 들어맞았으며, 출생하였다가 일찍 죽은 자에 대해서는 곁에다 동그라미 표시를 해두었으니 대체로 미리 알았던 일들이 많았다. 그가 살아 있었을 적에는 그의 특이함을 아무도 몰랐다.
그의 아버지 정자 이윤탁의 묘가 양주 노원에 있는데 그곳에 세운 비의 비문과 글씨는 다 이문건의 솜씨로 이루어진 것이다. 후손들이 먼 곳에 살고 있어 오래도록 성묘를 못하게 되자, 아무개가 그 주변을 점유하게 되었다. 근래 그 아무개가 묘 주변의 소나무를 베어내 이윤탁의 묘갈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완연히 새로한 것과 같았다. 그래서 산 밑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아무개가 남의 선대의 묘가 있는 곳을 차지하고서 어떻게 비석과 무덤은 훼손하지 않았소?" "신령한 비석 때문입니다. 산 밑에 살고 있는 주민 가운데 질병에 걸린 자가 그곳에 기도하면 효험을 보게 되고, 나무하는 아이들이 혹시라도 그 비석에 흠집을 내기라도 하면 재앙이 따르게 되어 그 신령함이 이와 같은데 누가 감히 훼손하겠습니까?" 이에 그 비문을 고찰하여 보니 앞면과 뒷면은 일반 비석과 같고 양쪽의 측면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한 문자가 있었다. 대체로 몇백 년 전에 언문으로 비석에 기록하였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차마 어떻게 못할 비 부모를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누구인들 부모가 없을쏘냐. 그렇다면 어떻게 차마 훼손하겠는가. 비석도 차마 침범하지 못할 경우이면 묘를 훼손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하니 만대 후에라도 모면하게 될 줄 알리라. 신령한 비 신령한 비석이다. 건드리는 사람은 앙화를 입으리라. 이를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