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형(1459-1520)의 본관은 후창이며, 자는 언평이다. 성종 11년(1480)에 20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고 6년 뒤에 중시에 장원하여 승지를 역임하고 벼슬이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황형의 시골집이 강화도의 연미정에 있었는데, 그가 그곳에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었다. 사람들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대감께서 이미 늙었는데 무엇하러 그렇게 많이 심으십니까?"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오"
그러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에 김천일, 최원이 들어와서 강화도를 보전하는데, 배와 기구를 만들 때 모두 그때 심었던 나무를 베어다 쓰고도 남았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에 양호가 선조대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가려고 할 적에 관에서 그 소나무를 베어다 행궁을 짓고 집과 성책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그제야 황형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황형이 박원종을 대신하여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던 날 박원종이 술을 가지고 동쪽의 교외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나라에 큰일이 있으니 장군은 잠깐 머무는 것이 좋겠소'라는 여덟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술을 권하는 틈에 가만히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반정 계획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형은 취한 것을 핑계로 못 본 체하고 갔다가 포천에 이르러 반정된 것을 들었다. 강화도에 있던 옛 집이 지금은 월곶진의 관사가 되었는데 건물을 지은 구조가 튼튼하여 새 것처럼 전해지며, 그 집을 고치려고 하면 문득 재변이 생긴다고 한다. 그 집의 뜰 아래 무더기로 된 대나무가 있는데 이것은 그가 대마도에서 회군할 때에 가지고 와서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62세에 이르러 죽었으며, 시호는 장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