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세창(1481-1548)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번중, 호는 둔재이다. 예조 판서 성현의 아들이며, 김굉필의 제자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왕 23년에 국문을 받고 평해로 귀양갔다가 김안로가 처벌받은 뒤에 불려 왔다. 인종 원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장연으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이보다 앞서 중종 14년에 승지로 있으면서 시국이 위태롭게 될 기미를 알았다. 오래 전부터 김정, 이자와 친하였는데 매번 그들에게 서슬이 너무 날카롭다는 것으로 경계하였다. 그 이듬해에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에 임명되어 집에 있었는데, 심정이 그가 청류들과는 뜻이 다르다고 여겨 성세창의 집을 찾아와 사간원 대사간을 시켜준다고 꾀었다. 성세창은 자신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사양했다.
"용렬하고 우둔한 사람이 어떻게 그 직책을 감당하겠습니까마는 지난날 국가에서 백면서생들을 처벌한 것은 실제로 애매하며 그들을 처벌하자고 북문으로 들어가 비밀리에 아뢴 것은 매우 올바르지 못하오. 언관(간관)의 직책에 있는 자는 비록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하더라도 의당 바로 간하여 그 잘못을 규명해야 할 것이오"
심정은 얼굴빛이 변하여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이 일로 당시 재상들의 비위를 크게 거슬렀다. 남곤이 죽자 정광필이 다시 정승이 되었다. 중종 23년에 기묘사화에 화를 당한 사람들을 조정하려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때 성세창이 이조 참판으로 있었다. 성세창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학식이 뛰어났는데, 그의 문장은 매우 법도가 있고 우아하였다. 오랫동안 예문관에 있다가 대제학을 맞게 되자 여러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 필법, 서화와 음률에도 정통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삼절이라고 지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