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운(1485-1528)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종룡, 호는 항재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변호하다가 배척을 당하여 파직되었으며, 2년 뒤에는 벼슬과 품계를 빼앗기고 관원의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유운은 성격이 활달하고 조행에 유의하지 않아 당시 집권 세력의 논의에 용납되지 않았다.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단양군의 객사에다 시 한 편을 써 놓았다.
흉측하고 미련한 돌 모두 주워다 깨끗한 물 흐르는 데다 고루 깔아나 볼까 바람도 잡고 바다신마저 가두고서 그 뒤에야 나의 배를 띄우리
간교한 무리들이 그 시를 외워 권하면서 유운이 신진 사류들의 고상하고 깨끗한 언론에 용납되지 않아 이런 시를 지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14년에 대사헌으로 발탁되자 그날로 임금에게 취임 인사를 하고 곧장 의금부로 달려가서 감옥의 문틈으로 그곳에갇혀 있는 조광조의 자를 부르며 그의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오래 전부터 일이 있으리란 것을 알았으나 이런 극한 상황에까지 이를 줄을 어찌 상상이나 하였겠나"
그는 조광조를 극력 비호하다가 탄핵을 당하여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권세를 잡고 있던 자들이 없는 사실을 꾸며 해치려고 하여 일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에 놓이자 세상을 한탄하며 술을 하도 많이 마셔 위장을 버려 죽음에 이르렀다.
중종 13년 무렵에 독서당 관원과 선배들이 모여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끝난 뒤에 조광조가 유운과 함께 자게 되었다. 밤중에 유운이 술이 다 깨지 않아 벗은 채로 일어나 조광조를 밟고 넘어갔다. 난간에 서서 소변을 보고 돌아올 때도 그렇게 하자, 조광조가 준엄하게 말했다.
"종룡(유운의 자), 이게 무슨 꼴인가?" "이게 좋은 걸세. 자네가 부르짖는 '소학'의 도리는 본받고 싶지 않네"
유운이 부끄러움 없이 이렇게 말하자 조광조 또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의 풍채와 인품을 아껴서 단지 언행을 단속하도록 권면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