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1480-1533)의 본관은 한산이고,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중종 14년에 음성으로 물러나 살면서 호를 음애라 하였다. 그 뒤 충주의 토계로 이사하여 집 이름을 몽암이라 하고, 호를 몽옹이라 하기도 하였는데, 54세에 죽었다. 그곳에 서원이 있다. 이자가 중종 13년(1518)에 조선 개국 이래로 말썽이 되었던 이씨 왕조의 조상이 명나라 서적에 잘못 기재된 것을 바로잡는 임무를 띤 종계변무주청사로 한충, 남곤과 함께 연경에 갔다. 그곳에서 남곤이 병에 걸리자, 한충은 간호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말하였다.
"저놈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선비들의 씨를 없애고 말 것이다"
이자는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지성으로 간호하였다.
"이 간사한 인물이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만리나 되는 타국에 함께 와서 죽어 가는 꼴을 어떻게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는단 말이오"
이자는 끝까지 남곤을 돌보아 죽지 않도록 하였다. 그 뒤 기묘사화 때에 이자가 잡혀갔다가 석방이 된 것은 남곤이 지난날 간호 받은 일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자가 김안로와는 인척 관계가 있고, 또 주계군 이심원에게 같이 글을 배운 사이이지만 두 사람이 평생토록 행한일들은 선행과 악행이 서로 반대가 되었으니, 김안로는 언제나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있었다.
기묘사화 뒤에 이자가 용궁으로 쫓겨나 있었는데 중종 27년에 김안로가 좌의정으로 함창에 있는 자기 선산에 성묘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궁을 지나면서 이자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자를 꺼려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시험삼아 동정을 탐지해 보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이자는 그의 마음 속을 먼저 환히 들여다보고 김안로가 그곳으로 올 때쯤 되어 홰나무꽃을 달인 물에 얼굴을 씻고 이불을 두르고 앉아 김안로를 맞았다. 김안로가 이자의 손을 잡고 은근히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고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