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수(1504-1547)의 본관은 평택이고, 자는 사수, 호는 금호이다. 중종 26년(1531)에 생원이 되고 중종 3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서 사가독서한 뒤에 설서를 지냈다. 수찬으로 회령 판관에 임명되어 임지로 나가는데, 어떤 때는 이틀에 한 끼만을 먹고 어떤 때에는 수일의 분량을 한꺼번에 먹으면서 말하였다.
"장수가 되는 사람은 이러한 습성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변방의 오랑캐를 잘 어루만져 그들의 환심을 얻고, '오산가' 수백 구를 지어 북방의 풍물을 기록하였다. 명종 2년(1547)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사사 당할 때 의기양양함이 평일과 같았다. 그는 태연히 안뜰에 들어가 부모에게 두 번 절하고 나왔다. 임형수는 채 열 살이 못 된 아들을 불러서 경계하였다. "절대로 글을 배우지 말아라" 아들이 돌아서자, 다시 불러 말하였다. "만일 글을 배우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이 될 터이니, 글은 배우되 과거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는 사약을 끌어다가 끓어 앉아 마시었다. 어떤 종이 울면서 안주를 올리니, 임형수가 그것을 물리치며 말하였다.
"상여꾼들이 벌을 줄 때에도 안주를 쓰지 않는 법인데, 이것은 어떤 술이냐"
임형수는 호당에 있을 당시 퇴계 이황과 같이 있었는데, 이황에게 사나이의 호쾌한 취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눈이 산에 가득히 쌓일 때 검은 돈피 가죽을 입고 흰 깃이 달린 긴 화살을 허리에 차고, 어깨에는 천근 짜리 센 각궁을 걸고 철총마를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달려들어가면, 큰 바람이 골짜기에서 일어나고 천만 그루의 나무가 진동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큰 멧돼지가 놀라 일어나서 길을 헤매며 달아날 때에 곧 활을 한껏 잡아당겨 쏘아 맞히고는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 그 돼지의 멱을 딴 다음, 고목을 베어 불을 피워 놓고 긴 꼬챙이로 그 고기를 꿰어서 구우면 기름과 피가 뚝뚝 떨어진다. 이때 호상(걸상)에 걸터앉아 고기를 저며서 먹으며 큼직한 은대접에 술을 가득히 부어 따뜻하게 데워서 시원하게 마신다. 얼큰히 취할 때에 하늘을 쳐다보면 골짜기의 구름이 눈이 되어 비단처럼 펄펄 내려 취한 얼굴에 흩날리게 된다. 이것이 장쾌한 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