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종신토록 장가를 못 들어도 김안로의 사위는 되지 않겠다고 한 정희등
정희등(?-1544)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원룡, 사간 구의 아들이다. 구의 호는 괴은이다.조광조 등과 함께 기묘사류에 속했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문을 닫고 틀어박혀 병을 핑계하고 자리에 앉아 18년이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새며느리를 맞아 예를 드리는 날에 일어나 다니기를 평시처럼 하니, 집안 식구들이 비로소 병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정희등은 조행이 독실하고 식견이 매우 넓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옷깃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 한차례 글을 읽되 비록 시간이 급하더라도 중지하지 않고 날마다 법도로 삼아 깊이 자득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중종 23년(1528)에 진사가 되고 중종 29년에 문과 급제하여 교리, 필선을 지냈다. 정희등이 상처를 하자, 김안로가 딸의 배필로 삼으려 했다.
"차라리 종신토록 장가를 들지 않더라도 권세가의 사위는 되지 않겠다"
정희등이 끝내 끊어 버리고 응답하지 않자 김안로가 매우 유감으로여겨 벼슬길이 막혔다. 김안로가 망하자 비로소 청직에 선발되었다. 정희등이 본디 진복창의 사람됨이 간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구수담이 진복창의 재주와 기예를 크게 인정하여 극력 천거 발탁하므로, 정희등이 큰 소리로 반대하였다.
"훗날 나라를 그르칠 수도 있는 간인을 시론에 참여하게 해서는 안 되오"
진복창이 정희등에게 유감을 품은 것이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구수담도 정희등이 너무 너그럽지 못한 것을 그르게 여겼다. 명종 즉위년(1545)에 정희등이 지평의 직에 있으면서 아뢰었다.
"구수담, 박광우, 김저가 일찍이 옥당에 있으면서 신과 함께 이조에서 대간을 뽑을 때에 잘못 선발한 실수를 논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간신 진복창을 지칭한 것이었다. 명종이 크게 성내어 정희등을 죄주려 하니, 대신이 회계하였다.
"정희등이 강직하게 직언한 것을 죄주어서는 옳지 못합니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 관원이 모두 교체되었다. 정희등이 출사하여 진복창이 앉았던 자리를 걷어내 불태우며 말하였다.
"사군자가 간인이 앉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모두 숙연해 하였다. 정희등이 용천으로 유배되어 갈 적에 어머니 김씨가 길까지 쫓아와 말하였다.
"네가 젊을 때부터 정직하게 살아왔으니, 죄를 얻은들 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겠느냐. 지금 영결하게 되니 나는 실로 할 말이 없다"
길에서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정희등은 이날 밤에 곤장 맞은 여독으로 죽었다. 뒤에 구수담이 죄를 받아 죽을 적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진복창의 간사함이 이에 이를 줄 몰랐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원룡(정희등의 자)을 만나겠느냐"
정희등이 죽게 되자, 가산은 관에 몰수되어 염습할 수조차 없었다. 가족들은 시체 옆에서 울고 있을 뿐이었는데, 한밤중에 도성 사람들이 모여들어 무명 3백 필을 거두어 모아 주면서, "누구인지 묻지 말라" 하였다. 장사지내는 날 영남에서 선비 1백여 인이 와서 조문하였는데, 모두 부의를 냈지만 성명을 말하지 않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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