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1482-1519)의 본관은 한양이고, 자는 효직, 호는 정암이다. 17세에 아버지 원강이 어천 찰방이 되었는데, 이때 한훤당 김굉필이 희천에 귀양와 있었다. 조광조가 그를 좇아 노닐면서 학문하는 큰 방법을 터득하였다. 김굉필이 햇볕에 꿩을 말려 제사에 쓰려고 뜰에 두었는데, 지키던 자의 부주의로 고양이에게 도둑을 맞고 말았다. 김굉필이 몹시 화를 내며 지키던 자를 꾸짖자 옆에 있던 조광조가 말하였다. "조상을 받드는 성의는 비록 간절하시나, 군자는 말씨와 기색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김굉필이 조광조의 손을 잡고 사과하였다. "나도 몹시 성을 내고는 곧바로 뉘우쳤는데, 네 말이 또 이러하니 나도 모르게 부끄럽고 감복되는구나. 그리고 네가 나의 스승이요 내가 네 스승이 아니다" 그 뒤 중종 5년(1510)에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종 14년에 대사헌이 되어 반열에 나아가는데 백관들이 그 위의와 풍채를 바라보고는 모두 감탄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대사헌에 임명된 지 사흘 만에 사람들이 예법을 지켜 남자와 여자가 길을 달리하여 다니었으니, 온 세상이 그를 우러르고 복종함이 이와 같았다. 그해 10월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능주에 유배되고 12월 20일에 사사되었다. 그가 38세로 목숨이 끊어질 때에 절명시를 지었다.
나라 근심을 내 집처럼 근심하고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했네 하늘의 해가 이 충심을 비추어 환하게 아래의 땅 굽어보리
정암이 사사될 적에 그의 아우 숭조가 급히 달려가서 길옆에서 우는데 어떤 노파가 산골짜기로부터 슬피 울며 와서 물었다.
"대인은 어찌하여 우십니까?" "나는 형님을 잃었으므로 울지만 노파는 어찌하여 우는고" "조정에서 조광조를 죽였다 하니, 현인이 죽었으므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웁니다"
황해도 강령군에서 세 사람이 들에서 같이 김을 매다가, 한 사람이 말했다.
"가뭄이 심하여 금년에는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을 것이다. 근년에 조광조가 아주 청렴 간명하여 각도의 주군이 소환 당하는 편지가 전해졌는데, 이 때문에 고을에 고함치고 호통치는 아전이 아주 없어졌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조광조가 유배되었다가 이미 죽었다 하니, 가뭄이 드는 이 천재는 아마도 조광조 같은 현인이 죽은 연유에서 생기는 듯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서울에 올라와서 이 말을 전하니, 곧바로 그 사람을 잡아와서 극형을 가해 죽였다. 같이 김매던 사람은 '고발하지 않은 죄'를 받았으며, 고발한 사람에게는 무명을 상으로 내렸다. 영상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이며 문묘에 종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