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1454-150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태허, 호는 매계이다. 성종 3년(1472)에 생원과 진사가 되었고, 성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추천으로 사국에 들어갔으며,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연산군 4년(1498)에 하정사로 중국 연경에 가서 미처돌아오기 전에 사화가 일어났다. 그가 일찍이 김종직의 문집을 편집하면서'조의제문'을 사초에서 뽑아 내어 '점필재집'에 수록하였는데, 그 죄목으로 연산군이 노하여 조위가 압록강을 건너오거든 즉시 목베어 죽이라고 명하였다. 조위가 요동에 이르러 그 말을 들었는데, 일행들이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위의 아우 신이 요동 지방에 유명한 점쟁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길흉을 물어 보니, 점쟁이는 오직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을 써 줄 뿐이었다.
천충 물결 속에서 몸을 뛰쳐나오지만 바위 아래에서 사흘 밤을 묵으리
조신이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하니, 조위가 말하였다.
"첫 구절은 화를 면한다는 뜻인 듯하나, 다음 구절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다"
압록강에 당도하자, 정승 이극균이 힘을 써 죽음은 면하고 의금부 도사가 잡아가 국문 하였다. 곤장을 맞고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에 이배되고 연산군 9년에 유배지에서 병으로 죽자 고향인 금산에 장사지냈다. 갑자사화 때에 전의 죄를 추록하여 관을 쪼개고 시체를 목베어 무덤 앞 바위 밑에 끌어내어 두고 사흘 동안이나 바깥에 드러내 놓게 되었다. 조신이 그제서야 그때의 점쟁이의 말이 징험이 있음을 알고 신기하게 여기며 탄식해 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