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서(1454-1504)의 본관은 임천이고, 자는 백부, 호는 지족정이다. 성종 5년(1474)에 생원시에 장원, 진사시에 2등을 하고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동왕 10년 중시에 장원하였다. 집안 대대로 진주에 살았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에 허침은 필선으로, 조지서는 보덕으로 같이 강관이 되었다. 연산군은 날마다 놀이나 장난을 일삼고 학문에는 전념하지 않았다. 조지서는 빗대어 타이르기를간절히 하다가 세자로부터 미움을 많이 당하였다. 세자에게 강의를 할 적마다 책을 앞에 던지면서 힘써 타일렀다.
"저하께서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면 신은 마땅히 임금께 아뢰겠습니다"
연산군은 그를 매우 괴롭게 여겨 원수처럼 대했다. 하루는 강의를 하기 위하여 동궁에 입시 하였다가 벽 쪽을 쳐다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었다.
조지서는 큰 소인이요 허침은 큰 성인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조지서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조지서는 외직의 보임을 청하여 창원부사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지리산아래에 터를 잡아 정자를 짓고, 편액을 '지족정'이라 하였다. 만흥시에 다음과 같이 읊었다.
가을이면 맑은 밤에 시간쪽지만 세고 아침이 되면 발을 걷어 뾰족한 산 대하네 꾀꼬리는 저녁빛 머금고 깊은 숲에서 울고 제비는 얕은 그늘 후리치고 짧은 처마에 들어오네 초야에 은거함은 게으름에 익숙한 것임을 알겠고 집이 가난함은 내 청렴을 위해서가 아니네 평생의 장대한 뜻 다 사그라져 없어지니 거울에 늙은 수염 비춰 보니 부끄럽구나
갑자사화 때에 정성근과 같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여 강물에 시체가 던져지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조지서의 부인 정씨는 포은 정몽주의 증손녀이다. 갑자사화 때 조지서가 정성근과 함께 잡혀갈 때 스스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술잔을 들어 부인과 작별하면서 말하였다.
"이번에 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 조상의 신주를 어찌하겠소?" 부인이 울면서 대답하였다. "죽음으로써 내가 보전하겠습니다" 조지서가 죽고 가산이 적몰되자, 조지서의 장인 정윤관이 딸에게 말했다. "집이 이미 패망하였는데 어찌 친정으로 돌아오지 않느냐" "죽은 그분이 나에게 조상의 신주를 부탁하였고, 제가 죽음으로써 보전하겠다고 승낙하였으니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정씨 부인은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초야를 떠돌아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겪었고, 손수 나무 열매를 주워서 아침, 저녁으로 곡읍하고 전을 올리면서 삼년상을 마쳤다. 중종은 조지서를 도승지로 추증하고 그의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정려문을 지어 정씨의 열행을 표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