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주(?-1504)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천지, 호는 오졸자이다. 6, 7세가 되자 글을 짓고 시를 읊었다. 성종 16년(1485)에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정언과 헌납을 역임하고 예천군수로 나갔는데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좋아했다. 이에 연산군이 그를 내직으로 불러들여 간관으로 임명하였다. 박한주가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종묘, 사직과 능침에는 한번도 제사지내지 않으시고 놀이와 잔치는 무상으로 베풀어서 밤을 낮으로 삼아 계속하시니 효도하는 도리에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연산군이 말하였다. "눈병이 있어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후원 안에서 말달리기와 제기차기를 하며 용봉장막을 쳐 놓고 연회를 벌일 때가 그처럼 많은데 주상께서 어찌하여 눈병이 났다고 말씀하십니까" 연산군이 발끈 성이 나서 얼굴빛이 변하였다. "용봉장막이 네 물건이냐?" 박한주가 대답하였다. "이는 모두 백성의 재력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의 장막이라 해도 옳을 것입니다. 어찌 상감의 사사로운 물건이겠습니까" 이어서 노사신, 임사홍의 간사함을 논하다가 마침내 모함을 받아, 점필재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무오사화 때 벽동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반정 후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