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량(1469-?)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순부, 호는 허암이다. 문장을 익히고 시에 능하였으며, 음양학에 통달하여 스스로 자기 운명을 점쳐 보고는 은둔하려는 뜻을 품었다. 성종 23년(1492)에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연산군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 봉교를 지내고 호당에 들어갔다. 무오사화 때에 의주로 귀양갔다가 내지인 김해로 옮긴 후 3년 뒤에야 풀려났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정성스럽게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는 늘 "갑자년의 화가 무오사화보다 심하여 우리들도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세상을 도피하려고 중이 내왕할 때면 서로 함께 모의를 하고 때때로 혼자 부모 묘소에 가서 배회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집 식구들은 어머니를 사모하는 것으로 여겼다. 어느 날 그는 집을 나갔다가 오래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구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종적을 찾아 물가에 이르렀는데, 짚신 두 벌과 상관이 물가에 있었다. 강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여기고 두루 찾았으나 끝내 그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친척인 해평군 정미수가 계를 올려, 그의 생김새와 복색을 알려 찾기를 청하였으나, 연산군은 "미친놈이 도망하여 죽었는데 무엇하러 찾느냐"고 하였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가 일어났으니, 그 말이 과연 징험된 셈이다.
퇴계 이황이 산중에서 '주역'을 읽는데, 한 늙은중이 곁에 있다가 이따금 구두의 잘못을 고쳐 주었다. 퇴계는 마음속으로 그가 허암일 것이라 여기고 물었다.
"지금은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때인데 정허암은 어찌하여 다시 속세에 나오지 않소?" "정희량은 어버이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다가 삼년상의 예를 마치지 못하였으니 불효요, 임금을 버리고 세상을 등졌으니 불충한 것이오. 불효하고 불충하였으니 죄가 막대한데, 무슨 면목으로 다시 인간 세상에 나가겠소"
그는 조금 뒤에 작별 인사를 하고 어디론가 홀연히 떠났다. 정희량이 장가를 든 뒤 아내를 멀리하여 얼굴을 대면하지 않았다. 정희량의 아내가 늙은 뒤에 단옷날을 잡아 남편의 기일로 삼고, 남겨놓은 의복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 용재 이행이 시를 지어 조문하였다.
비방과 칭찬 분분하게 만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도 허암공의 마음과 뜻 가늠하지 못하겠네 고양 남강 어디메에 남긴 자취 찾으랴 붉은 통 오색 끈을 부쳐 주기 원하노라
정희량은 화를 피해 중이 되어 스스로를 이천년이라 하고, 산수에 노닐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가천원의 벽에 시를 지어 붙였다.
그는 주역 수화기제괘(일이 이미 일정하게 되어 있는 모양)의 이치로 화로를 만들어 채소를 익혀 먹었는데, 아침, 저녁 식사할 때에도 오직 이 화로 하나뿐이었다. 그가 신선이 되어 가 버리자 세상 사람들이 이를 '신선로'라 하였다. 오늘 우리가 즐겨 먹는 신선로의 근원이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