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폐비 사건에 말려들지 않은 허종
허종(1434-1494)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종경, 호는 상우당이다. 세조 3년(1457)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왕 13년에 북병사로서 이시애를 토벌하여 적개공신 일등에 책록되었다. 그때 나이 34세였다. 소싯적에 벗과 같이 산중의 절에 기숙하며 글을 읽었는데, 밤에 도둑이 들어 옷과 신발을 훔쳐 가 버렸다. 도둑맞은 사실을 알고, 사람들은 모두 애를 태우며 한탄을 하는데 허종은 태연히 붓을 가져다가 벽에다 이렇게 적었다.
이미 내 옷을 훔쳐 갔으면 내 신은 훔쳐 가지 말아야 할 것이지, 옷도 가져가고 또 신발마저 훔쳐 가니 이는 도선생의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것을 보고 식자들은 그의 도량에 감복하였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가뭄이 심하여 조야가 비를 애타게 기다렸다. 방방(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합격증서를 주는 일)을 하는 날 갑과 1등을 부르자마자 비가 쏟아지니 그때 모두 '상나라 장마비처럼 태평성대가 올 징조'라고들 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그의 지조를 시험해 보기 위해 갑자기 대로하여 시신에게 머리를 꺼둘러 끌어내리게 하고 칼을 가져다가 무릎 위에 가로 걸쳐놓고 당대의 역사 최적에게 명령하였다.
"내가 이 칼을 뽑는데 갑에서 다 나오거든 곧바로 그의 목을 베어 버려라"
날카로운 칼날의 끄트머리가 나오자 이를 본 시자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데도 허종은 두려워하지 않고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 말소리가 또록또록 하고 힘찼다. 세조가 참된 장사라고 칭찬하며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고 술을 마시게 하였다. 허종은 천천히 술상 앞에 나아가서 술을 마시고 물러났는데 그 태도가 참으로 안온하였다. 성종 5년에 공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가 승하하고 후궁인 윤씨가 원자를 낳자, 윤씨를 책립하여 왕비로 삼았다. 윤씨는 여러 후궁들을 질투하여 임금에게까지 불손한 일을 자행했다. 임금이 대로하여 폐하여 내쫓았으며, 사사하려고 신하들을 불러 전정에서 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임금의 노여움이대단하여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허종은 영상이었는데, 이른 아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다가 그의 누이 집 앞을 지나게 되어 들어가 뵈었다. 그 누이가 폐비 윤씨를 사사하는 일에 대해 부당함을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민가에서 늙은 종이 집주인의 명령을 거역하기 어려워서 함께 주인 마님을 죽이는 것과 같으니, 후일에 그 아들이 가통을 계승할 때에 어찌 화환이 없겠는가"
허종이 크게 깨닫고 돌다리를 지나가다가 고의로 말에서 떨어져 발을 다쳤다고 핑계하고,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뒤에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왕이 되어 어머니 윤씨를 위해 복수를 할 적에 당시 회의에 참석한 사람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잡아 죽였으나, 허종은 홀로 화를 면하였다. 후인들이 그 다리를 가리켜 '허종이 빠진 다리'라 혀여 '종침교'라 하였으니, 지금 사직동에 있다. 허종 대감은 난시에는 싸움터에 나가 장군이 되고 평시에는 내직에 들어와 재상이 되었는데, 풍채가 늠름하고 기개가 헌걸 찼으며, 신장이 12척 5촌이나 되었다. 문장도 잘 하고 활을 잘 쏘아, 조정에서 그에게 의지한 바가 매우 켰다. 일찍이 이조 판서로 있을 적에 문장과 인물로 세상을 울리던 명나라의 동월과 왕창이 사신으로 왔다가, 12척 장신에 옥처럼 깨끗한 풍채와 의젓한 의관의 허종을 보고 감탄하여 자신들도 모르게 무릎을 꿇어 절하고 경서와 사서를 토론하였다. 동월, 왕창 두 사신이 귀국할 적에 압록강에 이르러서도 허종 대감을 사모하여 차마 헤어지지 못하였다. 폐비 윤씨가 폐위되기 전에 친히 베틀에 올라가서 비단을 짜는데, 임금이 찾아왔다. 왕비가 베틀에서 내려와 말하였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옥체가 이다지도 크십니까?" "나보다 더 큰 사람이 또 있다. 불러들일 터이니 그를 한번 보아라"
임금은 곧 명령을 내려 허종을 불러들였다. 성종 24년(1493) 61세에 죽었다. 공훈으로 양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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