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지(1415-1482)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순부, 호는 눌재이다. 여섯 살 때에 처음으로 글을 읽었고, 아홉 살 때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세종 23년(1441)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세조가 일찍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조용히 주연을 마련하고 각기 마음에 품고 있는 바를 전달하게 하였더니 양성지가 나아가 말했다.
"성상께서 대신을 두터운 예로 대우하시어 매번 술잔을 기울이며 담론하게 하시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술 마시는 일을 절제하시고 옥체를 보살피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대가 나를 아끼는구나" 세조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고, 홍문관 제학으로 승진시켜 임명하였다. 또 좌우에게 이르기를,
"양성지는 나의 제갈량이다" 하며, 발탁하여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성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좌리공신(성종 즉위를 보좌하는 공신에게 내린 훈명)으로 기록되고, 남원군에 봉해져 대제학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양성지는 글읽기를 좋아하여 널리 보고 잘 기억하였으며 손에세 책을 놓지 않아 상하 천년 사이의 치란흥망과 인물의 고하현부를 어제 있었던 일처럼 또렷이 알고 있었다. 장년 시절에는 군사에 관한 논의를 즐겨 하여 관련된 소를 10여 차례나 올렸는데,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군적에게 누락되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한 집안에서 장정이 한 사람뿐인 경우에는 군역에 세우지 않아야 하며, 한 사람의 장정이라도 재능을 시험하지 않고는 병사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평생 뜻이었다.
처음 벼슬하면서부터 집현전에 들어간 것이 16년이고, 서적의 교감을 맡은 것이 20년이며, 사관을 겸임한 것이 34년이고, 홍문관에 근무한 것이 26년이며, 문과의 고시관을 열 여섯 번이나 맡았다. 만년에는 벼슬을 사임하고 한가로이 날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시사를 토론하고 간혹 동자 한 명과 말 한 필로 통진별장에서 놀았는데, 조용하기가 시골의 평범한 늙은이 같았다. 일찍이 내각(규장각)의 관제 및 조례를 편집하였는데, 매우 분명하고 조리가 있었으므로 성종이 가상히 여겨 권장하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성종이 승하하였으므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가 정조 때에 이르러 내각을 설치하고 초계문신(당하 문관 중에서 문학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다달이 강독 제술 시험을 보일 때의 시험관)을 선발할 적에 이 조례를 적용하였다. 내각에 명하여 문집 3권을 출간하게 하였는데, 그때 각신 30여 명이 모두 양성지의 외손들이었다. 가집 6권이 있다. 68세에 죽었는데 시호는 문양이라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