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순효(1427-1497)의 본관은 평해이고, 자는 경보, 호는 물재 또는 칠휴거사라고 하였다. 문종 원년(1451)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단종 원년에 문과에, 세조 3년에는 중시에 급제하였으며 성종조에는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성종이 주연을 마련하여 중신들과 술을 마시는데 술이 거나하게 되자 손순효가 입을 열었다.
"직접 아뢸 일이 있습니다"
성종이 앉아 있는 어탑(임금이 앉는 상탑)으로 올라오도록 명하였다. 손순효가 머지않아 연산군이 임금의 자리를 잘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용상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나도 알고 있소" 손순효가 또 아뢰었다. "부녀자가 임금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려 국정을 어지럽히는 일이 너무 심하고, 바른 말을 마음대로 하는 언로가 막히겠습니다" 성종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겠소?" "임금이 만약 그런 상황을 아신다면 저절로 그런 실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이를 보고 연회에 참석한 재상들이 모두 놀라며 손순효가 아뢴 내용을 듣고 싶어하였으나 임금은 "내가 간하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할 뿐이었다.
손순효가 술을 너무 좋아하므로 성종이 만날 때마다 그를 경계하였다. "앞으로 세 잔 이상 마시지 마시오" 어느 날 승문원에서 올린 외교문서의 내용이 세련되지 못하여, 성종이 편전에 나아가 손순효를 불러오게 하였다. 손순효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오기는 하였는데 머리카락이 망건 밖으로 나와 헝클어져 있고 취한 기운이 온 얼굴에 가득 차 있었다. 성종이 노기를 띠고 말했다. "표문의 글이 정교하지 못하여 경으로 하여금 고쳐 짓게 하려고 하였더니 경이 이렇게 취했구려. 그리고 또 내가 일찍이 경의 면전에서 세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고 경계하였거늘 어찌하여 그 말대로 실천하지 않는가?" 손순효가 답하였다. "신에게 시집간 딸이 있사온대 못 본 지가 오래이기에 오늘 마침 지나다가 들렀더니 술상을 들여오길래 거절을 못하였는데, 다만 세 그릇을 비웠을 뿐입니다" "경이 마셨다는 술잔이 무슨 그릇인가?" "주발로 세 번 마셨습니다" "경은 이미 술이 취했으니 아마도 표문을 지을 수 없을 듯하오. 그러니 제학을 불러서 같이 짓도록 하오" "다른 사람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고 신이 고쳐 짓겠습니다" 성종이 쓰던 벼루를 가져다주게 하였더니 손순효가 곧바로 표문을 지어 바쳤다. 성종이 크게 기뻐하고 사용원에 명하여 연회를 베풀어 마침내 한껏 마시며 크게 취한 뒤에야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