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상(1427-1504)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양경이다. 세종 29년(144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종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조 3년에 중시에 급제하였다. 세조 9년(1463) 11월에 그는 형방승지로서 대궐에 들어가 숙직을 하였다. 그날 밤 날씨가 매우 추웠으므로 윤필상은 '날씨가 이렇게 추우니 아마도 주상께서 옥에 갇힌 죄수들을 걱정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서울과 지방에 있는 죄수들의 범죄 내용을 낱낱이 작은 책자에다 기록하여 두었다. 밤 오경이 되자 내시가 와서 형방승지를 급히 부른다는 왕명을 전하였다. 유필상은 허둥지둥 의관을 갖추고 죄수들의 범죄 내용을 기록한 작은 책자를 소매 속에 넣고 침전 앞에 대령하였다. 임금이 창문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일렀다.
"오늘밤은 매우 추워 따뜻한 방에서 털옷을 껴입고 있어도 견디기 어려운데 옥중의 죄수들이 이 혹독한 추위에 얼어 죽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먼 지방은 힘이 미치지 못하겠지만 현재 도성의 감옥에 있는 죄수가 얼마인지 속히 아뢰어라" "신의 직책이 형방승지입니다. 형옥에 관한 일은 신의 직무입니다"
윤필상이 즉시 작은 책자를 가지고 숫자를 보면서 죄목별로 죄수의 수를 소상하게 아뢰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깜짝 놀라며 그를 기특하게 여겨 창문을 열고 침전 안으로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윤필상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는데 땀이 흘러 등을 적시었다. 임금은 술을 내려 주도록 명하고, 내전(왕비)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보배로운 신하요"
그제야 윤필상은 정희왕후가 가까이 있음을 알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이 뒤로부터 차례를 뛰어넘어 기용되었으며, 얼마 안 가서 높은 벼슬에 승진되었다. 성종 9년(1478)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연산군 10년에 그는 진도로 귀양갔다. 성종 비 윤씨를 폐비하는 조정 의논에 참여하였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중종 때에 신원 되었다. 윤필상이 젊었을 적에 중국에 갔을 때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가 자신의 운명을 점쳐 본 일이 있다. 점쟁이는 그에게 말했다.
"수명과 벼슬은 모두 높겠지만 끝내 삼림 밑에서 죽을 운입니다"
윤필상은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정승이라는 찬란한 벼슬 생활을 누렸지만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끝내는 진도에 유배되었다. 어느 날 저녁, 이웃에 사는 사람이 김매는 품꾼들에게 말하였다.
"내일 아침에 상림의 밭으로 모이십시오" 윤필상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어느 곳을 상림이라 하오?" 밭주인이 대답했다. "여기서 5리 쯤 되는 곳에 상림, 중림, 하림이란 지명이 있습니다" 윤필상은 그제야 삼림 밑에서 죽을 것이라는 점쟁이의 점괘가떠올랐다. 그는 낙담하여 허공만 쳐다보았다. 얼마 안 되어 연산군이 보낸 사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