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1441-1468)의 본관은 의령이다. 의산군 남휘의 아들이며, 태종의 외손이다. 어릴 적의 일이다. 길거리에서 노는데 어떤 종아이가 봇짐을 짊어지고 가는데 그 봇짐 위에 분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귀신을 보지 못하였다. 남이는 이상히 여겨 그 아이가 가는 곳으로 따라갔다. 그 아이가 한 재상의 집으로 들어가더니 조금 후에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주인집 아가씨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내가 들어가 보면 살릴 수 있다"
남이가 이렇게 말했으나 그 재상의 집에서는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후에야 그렇게 하라고 하여 남이는 간신히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분바른 여귀는 장자의 가슴에 올라앉아 있다가 남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즉시 도망가고 낭자는 깨어서 일어났다. 남이가 문 밖으로 나가자 다시 여귀가 낭자의 가슴에 올라앉았고 낭자는 다시 까무러쳤다. 남이가 다시 들어가자 여귀는 도망가고 낭자는 깨어났다. 남이가 여귀에게 물었다.
"그 봇짐 속에 무엇이 들었는가?" "홍시인데 낭자가 먹고 기절한 것입니다"
남이는 그가 본 대로 모두 말하고 귀신 다스리는 약을 써서 낭자를 살려주었다. 그 낭자가 바로 좌의정 권람의 넷째 딸이었다. 권람은 이 일을 매우 신기하게 여기고 남이를 사윗감으로 택하여 첨을 쳤다. 점쟁이가 말했다.
"총각은 반드시 죄를 짓고 죽을 것입니다"
자기 딸의 운명을 점쳐 보니 목숨이 매우 짧고 자식이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 복을 누리고 화는 없을 터이니 사위를 삼아도 문제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그 말에 따라 권람은 남이를 사위로 삼았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의 용기는 다른 사람이 감히 따를 수 없었다. 그는 북쪽에서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고, 서쪽에서는 건주위를 정벌하였는데 모두 큰 공을 세우고 훈일등에 녹훈되었다. 남이는 회군할 적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서 다 닳았고 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서 다 말랐네 사내 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그를 대장부라고 하겠느냐
그는 26세에 병조 판서가 되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였다. 어느 날 남이가 궁궐 안에서 숙직하고 있을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혜성에 관해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펼 징조'라고 설명한 일밖에 없는데 이 말을 몰래 들은 유자광이 그 말에 다른 말을 보태어 남이가 모반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였다. 또 공주를 꾀어 간음하였다고 밀고하였다. 끝내 그는 모함에 걸려 죽게 되었다. 이때 그는 28세로 병조 판서였다. 권람의 딸인 그의 부인은 그보다 몇 년 먼저 죽었다. 점쟁이의 말이 사실로 들어맞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