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흥도의 본관은 영월이고, 직책은 영월군 호장이다. 세조 3년 10월에 단종이 승하하였다. 엄흥도는 곧 달려와 곡을 하고 모든 준비를 하여 시신을 거두고, 다른 의논이 있을까 겁을 내어 즉시 장례 하였다. 이때 엄흥도의 일가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 만류하자 엄흥도가 말하였다.
"선행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요"
그는 장례가 끝나자 아들 엄호현을 데리고 도망갔다. 엄흥도가 죽은 뒤에 그 아들은 몰래 영월로 되돌아왔다. 현종 10년(1669)에 우암 송시열이 엄흥도의 자손을 쓰자고 청하자 상이 허가하였다. 영조 때 정려각이 세워지고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현종이 제문을 지었다.
"어느 때인들 충신열사가 없으리요마는 어찌 엄흥도의 충성만 하겠는가. 아! 그때의 강원도에는 감사도 있었고 수령도 있었지만 일개 호장으로서 능히 큰 충절을 세웠구나. 아! 사육신은 마음을 다해 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거니와 영월 호장 엄흥도는 무슨 요구가 있고 무슨 소망이 있기에 일가들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가. 이는 진실로 한 조각 붉은 마음 때문일 것이니, 지난 역사에도 듣기 힘든 일이구나. 백대를 전하도록 의열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