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1417-1456)의 본관은 순천이고,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이다. 세종 16년(1434)에 문과시, 29년에 중시(이미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다시 보이는 시험)에 각각 합격하였다. 을해년에 단종이 선위하니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빠져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를 본 성삼문이 제지하며 말하였다.
"우리 상황(단종)을 위하여 뒷날을 기약하자. 만약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박팽년은 그의 말에 따랐다. 드디어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유응부 등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였다. 박팽년은 충청감사로 나갔다가 세조 2년 (1456)에 형조 참판이 되었다. 모의가 발각되어 국문 받을 적에 박팽년은 당당하게 말했다.
"성승, 유응부, 박청이 운검이 되었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때 장소가 좁아서 운검을 세우지 않은 까닭에 성공하지 못하고 뒷날 임금이 권농하러 가는 길에 일을 꾀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은근히 달랬다.
"네가 만약 나에게 돌아온다면 살려주겠다" "..."
박팽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을 신이라고 일컫지도 않았다. 세조가 노여워하며 말했다.
"너는 이미 나에게 신이라고 칭하였는데 이제 와서 신이라고 청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나는 상왕의 신하입니다. 전에 제가 관찰사로 있었을 적에 올린 편지에도 신이라고 칭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의 편지를 가져와서 확인해 보니 모두 신자가 아닌 거자였다. 금부도사인 김명중이 박팽년을 달랬다. "공은 어찌하여 이런 화를 자초하는가?" 팽년은 한숨지으며 말했다.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니 부득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네" 팽년은 죽음을 앞두고 그의 아버지 박중림에게 울면서 말하였다. "임금에게 충성하고자 하다가 이런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박중림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임금에게 불충을 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지 않느냐?" 선조 16년(1583)에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옛적에 박팽년이 친구를 추천하였는데 그 친구가 은혜를 갚기 위하여 사례하자 박팽년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청렴한 사람이다"
영조 34년(175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정이라 하였다. 동왕 51년에 정려가 세워졌다. 박팽년의 아들 생원 헌과 순, 그 아우 분과 박팽년 부자 여덟 사람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순의 아내 이씨는 대구 관비가 되었는데 마침 임신중이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마침 여종은 딸을 낳았으므로 서로 바꾸어 길렀다. 아들 이름은 박비라 하였다. 성종 3년(1472)에 순의 친구의 사위 이극균이 영남 도백이 되었는데, 박비에게 권하여 자수시켰다. 성종 임금은 그를 특별히 사면 하였으며, 이름을 일산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