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운(1390-1440)의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백경, 호는 조은이다. 태종 때 생원시와 문과에 각각 합격하여 이조 참의가 되었다. 나라일로 중국에 들어가 일을 성공시키고 돌아온 공으로 논밭과 노비를 하사했는데, 치운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말했다.
"하사하신 논밭과 노비를 받지 않으니 내 마음이 이렇게 좋소" "임금의 하사를 사양하다니 복도 지지리 없구려"
그는 본시 술을 지나치게 좋아한 까닭에 이를 알고 있는 세종이 어찰(임금의 편지)을 내려 주의를 환기시켰다. 치운은 그 어찰을 벽 좌우에 붙여 놓고 들락거릴 적마다 그것을 보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워낙술을 좋아한 최치운은 밖에만 나가면 술에 취해서 돌아왔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그의 머리를 흔들고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그러면 치운은 취중에서도 상에 머리를 박으면서 사죄하는 시늉을 하였으며, 술을 깨면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상의 은혜에 감동되어 늘 술조심은 하고 있지만 술집 앞을 지나게 되면 그만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취하도록 마시게 된다"
그는 최윤덕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왕명에 의하여 '무원록'을 주석 하였다. 최치운의 아들 최응현의 호는 수재이다. 단종 2년(1454)에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고 대사헌을 거쳐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속세의 영욕을 그 몇 해나 겪었던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백발이 성성하네 전원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버릇이 되었을 뿐 아침에 일어나면 그 자리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