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8장 화려항 명성, 처참한 최후
장군의 죽음 - 군웅신이 된 최영 / 남이 / 장보고/ 임경업
모든 사람들은 잘 죽고 싶어한다. 천수를 누린다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없이 눈을 감는 고종명의 그런 죽음을 원한다. 그런데 역사는 출중한 사람, 비범한 사람에게는 그런 죽음을 허용하지 않고 비범한 죽음을 잇따르게 하였다. 그래서 걸출한 영웅들이 비명에 희생되는 예를 찾아보기는 힘들지 않다. 이순신과 계백은 훌륭히 전사했다. 그들은 이미 죽을 장소를 스스로 택해 남이 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죽음을 이룩했던 것이다. 황산벌 싸움터에 나가기 전 날, 계백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직접 칼로 목을 베었다. 패배는 자명한 일, 따라서 적군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족의 목을 베고 자신도 죽기를 다해 싸웠다. 나당 연합군 10만 명과 백제의 5천 결사대와의 싸움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신라군을 네 차례나 무찔렀지만 중과부족이었다. 내 여기서 죽기를 한하고 싸우리라. 다짐하던 충무공도 노량해전에서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장군다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그렇지 못한 죽음이 있다. 영예로운 전사가 아닌, 모함으로 비명에 간 장군들의 죽음. 더구나 그들은 죽어서 무녀들의 섬김을 받는, 무속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고려의 명장 최영은 어릴때부터 얼굴에 위엄이 있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용맹 또한 뛰어났다. 고려는 원나라를 90여 년 동안이나 섬겨오고 있었다. 최영은 원나라에 속해 있던 압록강 서쪽의 8참을 수복하고,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4백여척을 격파하였다. 왜구토벌에 큰 공을 세우고 여러 난을 평정하였다. 그래서 재상직인 영삼사사가 되고 곧 문하시중에 올랐다. 1376년 우왕 2년, 홍산(부여군) 대첩에 참가한 그는 입술에 화살이 꽂혔건만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적장을 쏜 뒤에 피가 흐르는 그 화살을 뽑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왜구는 머리가 하얀 백수 최만호를 제일 두려워하였다. 그 뒤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나서자 최영은 요동정벌을 주장하였다. 그는 8도 도통사가 되고 19세 아래이던 이성계와 조민수를 좌우군 도통사로 삼아 평양까지 출정하였다. 위화도에서 그 좌우군이 회군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우왕은 곧 최영에게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뿐만아니라 붙잡아오는 사람에게는 상과 작위를 주겠다는 포고문도 발표했다. 우왕의 뜻을 안 이성계와 조민수는 사생결단으로 대항했다. 대세는 회군병력엠 기울어져 있었다. 게다가 궁성병력은 약세였고 병사들은 이성계의 위세에 눌려 전의는 상실되었다. 최영 역시 그와같은 대세를 읽고 있었으므로 병사들을 우왕이 있는 화원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회군병력은 곧 화원을 둘러싸고 항복을 요구해오며 안으로 쳐들어왔다. 최영은 곽총보 등 몇 장수에 의해 포박되었다. 그는 유배길에 오르게 되며 우왕은 폐위되고 요동정벌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귀양길에 오른 최영은 고향인 고봉현(고양)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합포(마산)로 이배되었다. 그 뒤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1388년이 다 저물어가는 12월 어느 날, 73세의 고령에 이른 최영은 형장으로 끌려나갔다. 그의 얼굴은 조금도 흐트러진 기색이 없었고, 말과 태도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내 한 몸 죽는 건 두렵지 않다. 오직 고려 사직의 존망이 염려 될 뿐이다. 과연 그는 기울어가는 고려왕조의 마지막 기둥이었다.
남이 장군은 태종 방원의 외손답게 기걸이 호협하여 벌써 17세의 나이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당시 좌의정이던 권람의 사위가 되었고, 27세에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이조 역사상 최연소 장관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용맹으로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서쪽으로 건주위를 칠 적에 선봉으로 나가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승리를 거두고 회군할 때 그가 지은 시는 널리 알려진 바 그대로이다.
백두산 높은 봉을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백두산석마도진)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니 (두만강수음마무) 남아 20세에 나라 평정 못하면 (남아이십말평국) 그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오. (후세수칭대장부)
1468년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그는 대궐 안에서 숙직을 하였다. 그날 밤 혜성이 나타났다. 이를 보고 남이가 동료와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이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려는 형상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평소 그의 승진을 질투하고 있던 유자광이 엿듣고 있다가 남이가 모반한다. 는 무고를 꾸며 옥사가 일어난다. 남아이십말평국 이 말득국 으로 둔갑되어 고해졌다. 간신 유자광의 모함으로 아깝게 그가 주살되니 나이 겨우 28세였다. 남이가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다 죽어가던 낭자가 살아났다는 등 남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의 위용은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지금도 남이는 장군신으로 무속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서울 용문동과 사근동에 그의 사당이 있어 지금도 주기적으로 제가 올려지고 있다. 용문동의 경우는 4, 7, 10월의 초하룻날에 치제하고, 매 3년마다 4월 1일에는 대규모의 제를 거행하고 있다.
신라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장보고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아 궁복이라고 불리웠다. 그는 장군이 되고 싶어했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뜻을 이룰 수 없자 당나라 서주로 건너갔다. 그곳 무술대회에서 장원으로 뽑혔고, 당나라 황제의 군관벼슬을 받는다. 무령군 소장의 벼슬에 올랐으나 어느 날 등주에서 신라인이 해적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리는 사실을 목격하고는 벼슬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왕께 이러한 사실을 아뢰고 군사 1만명을 허락을 받아 해상 교통의 중심지인 완도에 진을 쳤다. 항만시설을 갖추자 왕은 청해진(완도) 대사로 그를 임명하였다. 해적과 왜구를 일시에 소탕하고 해상권을 손에 쥐니 그의 이름이 높아졌다. 그 후 장보고는 김우징과 반란을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신무왕이다. 신무왕은 청해진에서 군사를 얻을 때, 장보고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 이 일이 성공하기만 하면 장군의 딸을 내 며느리로 삼겠다 그러나 즉위한 그해에 신무왕은 바로 죽고 말았다.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문성왕이 되었다. 장보고는 문성왕에 의해 장군이 되었다. 문성왕에게는 이미 왕비 박씨가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의논할 때, 장보고의 권력을 시기하던 대신들은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근본도 모르는 천한 섬놈의 딸 이라고. 이것을 전해들은 장보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급할 때는 쫓아와서 통사정을 하고 원하지도 않은 약속까지 먼저 해놓고 이제와서 딴소리를 하다니 썩어빠진 놈들! 홧김에 내뱉은 그의 욕설이 그대로 궁안으로 들어갔다. 조정에서는 더럭 겁을 냈다. 막강한 군력을 쥔 그가 홧김에 쳐들어오지나 않을까 해서. 그의 옛부하이던 염장이 자청해서 나섰다. 왕은 염장에게 일이 성사되면 청해진의 자치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장보고의 휘하로 달려가 거짓말로 비위를 맞추었다. 장군의 은혜를 배신하고 이제 와서 욕이나 하는 왕족이니 귀족이니 하는 족속들이 역겨워 도망쳐 왔는데, 이제부터는 장군의 수족이 되어 죽을 때까지 한마음으로 모시겠다고 하며 거짓 충성을 그에게 맹세했다. 그날밤 그들은 어울려 술을 마셨다. 장보고가 술에 대취하여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자 염장은 칼을 뽑아 그의 가슴을 힘껏 내리찔렀다. 841년 11월이었다. 애통한 것은 한 개인의 손실만이 아니라, 해상제패의 꿈이 꺽여, 그 후 잦은 외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임경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년 뒤, 신립장군이 저사한 충주 탄금대가 있는 달천 강가에서 태어났다. 스물 다섯 살이 되던 광해군 10년, 그는 무과에 합격하였고, 이괄의 난 을 평정했다. 인조는 친명정책을 펴다가 청나라의 무력에 굴복하고 형제의 의를 맺어야 하는 수모를 겪는다. 좌영장으로 있던 임경업은 급히 강화도로 달려갔으나 이미 조선이 화의를 제의하여 전쟁이 끝난 뒤였다. 그는 분해하였다. 나에게 정병 4만명만 준다면 내 반드시 오랑캐를 섬멸하고 압록강 물에 칼을 씻고 돌아올 것인데. 그 뒤 정승 김육에게 신임받아 청천강 북쪽 변경을 지키는 방어사에 임명되었다. 청나라에 투항한 장수들을 명나라가 토벌할 때, 구원병으로 보내 많은 공을 세우자 명나라는 그에게 총병관이라는 직책을 주었으며 그의이름은 명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청태종은 트집을 잡아 2차 조선공격에 나섰다. 백마성을 지키던 임경업은 수천 개의 허수아비 인형을 성 주위에 세워 청군을 따 돌렸다. 또 청나라가 명군을 치기 위해 조선군사를 동원하라고 강요하자 차출된 임경업이 꾀를 내어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조선군사는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번에는 청나라가 명나라의 금주를 공격하기 위해 또 구원병을 요청해왔다. 임경업이 그 임무를 맡아서, 파도가 높다는 핑계로 출전을 지연시켰고 명나라 군대와 싸울 때도 화살촉을 빼고 쏘도록 했으며, 대포에는 흙포를 넣어 발사하도록 하였다. 명나라 군대도 먼 거리에서만 화살을 쏘아 닿지 않게 하였다. 이러한 진의가 탄로나자 임경업은 청나라로 붙잡혀가게 된다. 이때 정승 심기원이 돈과 중옷과 칼을 주었는데 압송되어 가던 중 그는 금교역에서 달아나 머리를 깎고 승복으로 갈아 입고 화암사로 가서 숨었다. 거리에 화상이 나붙고 포졸들이 추격하자 그는 명나라로 피신할 것을 결심한다. 조정은 청나라의 등상에 못이겨 임경업의 부인을 대신 청나라로 보냈다. 심양의 감옥에 갇힌 그녀는 끝내 스스로 자결하고 만다. 임경업은 우여곡절 끝에 명나라 북경에 도착했다. 몇 달 뒤 청나라의 공격으로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임경업은 그때 장군 마등홍 휘하에 있었는데 그자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그냥 청나라에 항복한다면 자칫 죽을지도 모르지. 지금 청나라에 큰 죄를 짓고 도망친 임경업이란 작자를 잡아 바치면 아마 크게 환영을 받을 거야. 결국 임경업은 청나라의 손에 넘겨져 북경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 조선에서는 임경업을 도망가도록 도와 주었던 심기원이 역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의 정적은 김자점. 임경업도 서울로 압송되었다. 김자점 일당에게 극심한 문초를 받고 끝내는 처형되었다. 임경업은 최후의 순간까지 눈을 부릅뜨고 이렇게 외쳤다. 천하의 일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찌 나를 죽이려 하는가? 오늘 나를 죽이면 내일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의 나이 53살이었다. 임경업 장군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슬펏하지 않는 백성이 없을 정도였다. 왕도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임경업이 죽었구나, 그러나 내가 너를 죽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숙종은 그의 고향 충주에 충렬사를 지어 그를 기리도록 하였다.
최영 장군은 산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는데, 장군사당은 임진강 건너 개성 덕물산에 잇다. 특히 <산신거리> <산마누라거리>에서 최영 장군의 신을 모신다. 덕물산 기슭은 서울 이북 경기도, 황해도 뭇고의 본거지이다. 산꼭대기에 최영 장군을 신장으로 모신 장군당이 있어 이태 걸러 음력 3월이면 도당굿이 열렸다. 그의 말대로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았는데 덕물산 신당에서도 사나운 비바람을 일으키며 때때로 괴이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굿판이 끝나면 잔치가 벌어지곤 했는데 진미로 꼽는 돼지비계를 뜯는다. 성계육 이라 부르며 이성계의 살점을 씹듯이 콱콱 씹었다고 한다. 무속의 신은 한을 품은 존재로서, 그들의 한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재앙을 갖다주기 때문에 우선 그 한을 풀어 재앙을 물리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복을 빌었으니 즉 해원과 기복적 의례가 굿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큰 힘을 행사하던 권능을 지닌 원령이라야 살아있는 사람에게 화복을 줄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원혼이 된 혼련들만이 카리스마적인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기에 그 원혼을 위무해주고, 안주시켜 줌으로써 그쪽에서도 보답으로 이쪽을 수호해 준다고 믿는 공감대 의식의 착상이라고나 할까. 장군령은 무녀의 수호신으로, 무장의 영은 군웅이라고 해서 그 소속과 기능에 따라 상산별군웅, 사살군웅, 사신군웅 등 군웅대신으로 호칭된다. 영웅숭배주의는 무속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차피 무속의례의 본질은 영웅숭배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진다. 특이한 것은 계백이나 이순신 같은 훌륭한 장군은 다만 존경의 대상이 될 뿐이지, 신앙화되기는 어렵다고 한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포감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니 무속의 대상이 되려면 공포감을 극대화시킨 원혼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고 일본에서도 원혼이 큰 인물에 대하여 공포감을 갖고 이를 신으로 떠받들며, 중국에서는 아들 관평과 함께 손권에 의해 참살된 관우도 장군신으로 모시고 있다. 낙양에서 조조가 죽기 직전에 관우의 잘린 목이 당도했는데 사람들은 관우의 원령이 내린 재앙 이라고 말했다. 조조가 병사한 나이는 66세였고, 관우의 목이 떨어진 것은 그의 나이 58세였다. 산천초목, 어디에라도 대고 비손을 해야 마음을 놓던 우리네의 정서 탓인가. 인천에서 생활하는 무속인들은 맥아더장군까지도 마을신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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