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6부 독부와 현부
폭군을 조종한 궁녀의 치맛바람 - 장녹수
장녹수는 요부다. 장녹수는 전비, 김귀비 등과 함께 연산군이 사랑을 기울여 온 여인이었다. 이 가운데서 연산군은 장녹수를 가장 총애하였는데, 폭군 연산의 파멸은 장녹수로 인하여 더욱 빨리 밀어닥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녹수. 그녀는 요화다. 그녀는 애초에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 대군의 시녀였다. 장녹수의 형부 김효손은 출세욕이 강한 자여서 자기 처제를 제물로 바칠 궁리를 하였다. "임금(연산군)께서 색을 좋아하신다지? 흐흥, 녹수가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머리가 영리한 편이라 녹수를 임금께 바치면 얼마 아니 되어서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야." 장녹수는 목소리가 고왔다. 녹수의 목소리는 선천적으로 곱고 깨끗하여 한번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사람이면 정이 저절로 기울어지는 그런 마력을 가진 여자였다. 그래서 장녹수는 또한 마녀이다. 그 당시 연산군은 왕비와 궁인 곽씨, 그리고 윤훤의 딸을 맞아들여 정을 쏟고 있었다. 김효손은 장녹수의 나이가 연산군보다 위였으나 아직 소녀티가 완연한 장녹수를 그의 계획대로 연산군에게 바쳤다. 장녹수와 하룻밤 지내 본 연산군은 녹수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녀를 숙원으로 봉했다. "숙원(녹수), 그대는 남자를 사로잡는 힘이 있는 사람이구려." "아이, 부끄럽사와요." 장녹수는 요염한 교태로 연산군을 옴쭉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마마, 정사를 보살피시어 조정을 바로잡는 일이 급하옵니다." 장녹수는 주야로 자기 곁을 떠나지 않고 불어 있는 연사군에게 일부러 그런 말을 해 보았다. "국정이고 뭐고 지금은 다 귀찮구려. 그저 숙원 그대만 내 곁에 있으면 그만이야." 장녹수는 탕녀였다. '마마께서 나를 총애하신다. 마마는 나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분이다.......' 장녹수는 차츰 우월감에 빠져들어 교만해져 갔고, 안하무인이 되어 갔다. '이 나라를 움직이는 이는 마마지만, 나는 그 상감마마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잇다. 이 나라는 이제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 이 나라는 이제 내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어.' 연산군은 장녹수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예쁜 소녀들을 대궐안으로 뽑아 들여 노래와 춤을 가르쳐서 연회가 있을 때마다 춤을 추게 하였다. 그 위에 또 명기들을 불러 연회장을 흥겹게 만들기도 하였다. 임금이 장녹수에게 빠져 버리자 출세욕이 강한 아첨배들은 금은 보화를 싣고 와서 장녹수에게 갖다 바쳤다. 장녹수는 그 재물로 연산군과의 환락을 위해 궁궐을 호화롭게 꾸미는 데 모조리 써 버렸다. 그 때부터 대궐 안은 연일 가야금과 아쟁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에 따라 백성들의 원성도 자연 높아갔다. 백성들은 창덕궁의 야트막한 담장 너머에서 대궐 안의 연회장을 구경하려고 법석을 떨었다. 장녹수는 자기도 시녀 출신이면서 천한 백성들이 대궐 안을 기웃 거리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 당장 도승지 이극균에게 대궐 담장을 두 길 높이로 쌓아 올리고 담 밖의 민가를 모두 없애도록 하리라." "하옵고 마마........" "응, 또 무슨 일이오?" "대궐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이 죄다 내려다보이는 저 산속의 절들을 모두 없애 주소서." "알았노라. 알았노라. 듣거라!" 연산군은 주위를 돌아다보며 소리쳤다. "네이!" "당장 저 높은 곳에 있는 복세암과 인왕사, 금강굴 등을 모조리 헐어 내리고 백악, 인왕, 사직산 등에는 일제 사람의 출입을 금하도록 하라!" 누구의 영이라고 거역하랴. 연산군은 장녹수의 궁중놀이를 위해 전에 없던 조치를 내렸다. 장녹수가 임금을 움직여 연회와 놀이에 필요한 시설을 갖춘 것은 연산군 몰락의 시작인 셈이었다. 파멸의 요소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때마침 연산군의 조모 신씨가 폐비 윤씨의 유언에 따라 피묻은 수건을 들고 임금 앞에 나타났다. "에잇 괘씸한 것들! 내 어머니 원수들하고 한 지붕 밑에서 산 것이 분하도다. 당장 정소용과 엄숙의를 끌어냐 오너라!" 연산군은 두 사람이 성종의 총회들로서 연산군의 어머니 윤비를 죽게 한 원수라는 것은 알고 끌어내어 죽여 버렸다. 인수 대비는 이 끔찍한 사건이 화근이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소용과 엄숙의 소생들은 모두 귀양을 보내어 버렸고, 생모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한 연류자들도 모두 화를 입었는데 세상에서는 이 사건을 '갑자사화'라 일컬었다. 실정이 거듭될수록 백성들은 장녹수를 비방하게 되었고, 연산군과 장녹수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투서가 날아들었다. 장녹수는 백성들이 원성 따위는 아예 귀를 닫아 버리고 연사군에게 또 다른 향악거리를 권하였다. "마마, 비좁은 대궐 안에서 연회를 베풀어 풍악을 즐기는 것도 좋겠지만 대궐 밖으로 납시어 사냥을 해 보심이 어떠하온지요?" "사냥이라? 산야로 말을 달리며 짐승을 잡는 것도 괜찮은 일이리라." 연산군은 찬성이었다. 그는 곧 그 일을 실천에 옮겼다. 이 땅은 연산군의 사냥을 위한 놀이터가 되어 버렸다. 한성에서 시작하여 상당한 거리에 금표를 해 세웠다. "출입 금지!" 조선 강토는 연산군과 장녹수의 오락장으로 출입이 제한된 곳이 많았다.
동으로는 삼전도. 서로는 파주 보곡현. 남으로는 양화도. 북으로는 홍복산. 그 넓고 광활한 지역이 장녹수의 청에 의하여 그녀와 연산군의 놀이터로 변해 버린 것이다. 사방에 금표를 세워 그 안의 백성들의 집은 철거되고 전답도 놀이터로 빼앗기다시피 되었다. 연산군은 장녹수를 비롯한 많은 미희들을 거느리고 사냥에 필요한 군사와 포수들을 대동하고는 황무지가 된 백성의 땅을 치달리며 짐승을 잡아 내었다. 연산군의 취미는 별났다. 사냥에 나가 짐승을 잡아 내는 것을 큰 재미로 삼던 그는 전국에 채홍 준사를 내보내어 여자와 말을 뽑아 오게 하였다. 사냥에서 돌아온 연산군은 미인들을 원각사에 모아 곡연을 즐겼으니 백성들의 원성이 일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채홍준사가 대체 뭔고. 그 사람들이 한 번 떴다 하면 아름다운 미희와 날랜 말이 남아나지를 않는다니 그것도 장녹수년 입김인가?" "왜 아니겠수, 홍이란 여자요, 준이란 말이란 뜻이나, 왕이 예쁜 미희를 뽑아 방탕무도한 놀이를 하라는 수작이요, 좋은 말을 뽑아 올려 사냥을 계속하자는 욕심이니 그저 죽어 나는 게 백성일밖에." 전국에서 뽑아 얼린 미희들과 음탕한 생활을 즐기며 연산군은 점점 포악해져 갔다. 사족의 미혼 처녀들을 뽑아 올리기 위해 연산군은 따로 채청사를 두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흥청'이란 말이 생겨났다. 그 말은 또 차츰 변하여 '흥청망청'이란 말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다. 장녹수가 길들여 놓은 '여자와 놀아나는 재미'는 날이 갈수록 연산군을 부덕하게 만들었다. 그는 절간의 비구니까지 예쁘기만 하면 데려다 범해 버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왕은 정경 부인이고 종실 부인이고 가리는 법 없이 얼굴만 반반 하면 간음해 버렸다. 게다가 그는 휘숙 옹주까지 범한 것이다. "뭐, 뭐야? 휘숙 옹주라면 임승재의 부인이 아닌가?" "왜 아닌가. 남의 계집이기 전에 성종의 서녀 아니냐구?" "암, 성종의 서녀구말구." "그렇다면 바로 왕(연산군)의 누, 누이동생뻘이 아니야! 서매이긴 해도 누이동생인데 제 누이동생과 자빠져 자는 놈이......." "쉬이, 누가 들으면 목 달아다네. 말 조심하게." 배다른 누이동생이네 범한 연산군은 한술 더 떠서 백부 월산 대군의 부인, 그러니까 제 큰 어머니 박씨 부인까지 간음해 버렸다. 큰 어머니 박씨 부인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연산군이 다녀간 뒤로 그녀는 임신을 하였다. 분함과 부끄러움으로 몸져 누워 있던 박씨 부인은 동생 박원종을 불러 눈물로 하소연을 하였다. "조카에게 몸을 더럽히다니....... 아........" 쉴 새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박원종은 분노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인륜에 벗어난 짓을 저지른 사람, 차마 밝은 하늘 아래 이 부끄러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네......" ".........." "나는 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 분하고 부끄러운 몸을 청산하려 한다. 허니, 내 분하고 원통한 일을 네가 갚아 다오." "........." 박원종은 당장은 아무 대답을 못하였으나 박씨 부인이 자기에게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죽자 복수의 칼을 갈았다. "어디 두고 보자. 내 이놈의 패덕한 왕을 몰아내구........" 그는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장녹수의 치마폭 안에서 연산군의 방탕은 시들 줄을 몰랐고, 국정은 나날이 부패해 갔다. 박원종은 뜻이 맞는 동지를 규합했다.
성희안. 이조 참판 성희안이 연산군 제거에 뜻을 같이하고 나섰다. 그들은 그들의 뜻에 동조하는 동지를 규합했다. 동지의 수는 날로 늘어갔다. 마침내 기회는 왔다. 1506년, 그러니까 연산군 12월 9월 1일. 연산군은 대궐을 비우게 되었다. 그는 미희들과 함께 지금의 경기도 장단 석벽에 새로 지은 정자에 나아가 한바탕 흥청거릴 계획이었다. "기회는 이때다!" 박원종과 연산군 제거에 찬동하는 충신들은 거사에 필요한 장정들을 모이게 했다. 그러나. "엉? 일이 글렀다." "왜?" "연산군이 눈치를 챘는지 놀이 계획을 취소했다." "빌어먹을 자식!" "어떻게 할까?" "주저할 것 없다. 거사를 거행하자!" 박원종은 장정들에게 지시했다. 이미 대궐을 지키는 군사들을 매수하여 궁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장정들은 돈화문 앞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쿠데타가 일어난 것을 안 연산군은 광인처럼 날뛰었다. "칼과 화살을 가져오너라!" "........." "누구 아무도 없느냐!" "........" 알 턱이 없었다. "덮쳐라!" 삽시간에 대궐 문을 열고 들어간 박원종 일파에게 연산군은 옥새를 빼앗겼다. 그들은 곧 진성 대군을 옹립하여 새 임금으로 삼았다. 사방에서 백성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연산군과 장녹수는 그제서야 비로소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백성과 조정은 연산군에게서 등을 돌렸다. 장녹수와 몇몇의 여인들만이 왕위를 빼앗긴 연산군 옆에서 울부짖었다. 박원종은 떨고 있는 장녹수 앞에 다가가 칼을 뽑아 들었다. "네 이년!" 호령 소리에 박원종은 칼을 내리쳤다. "아."장녹수는 박원종의 칼에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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