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5부 왕권과 여권
누가 이 거인에게 돌을 던지랴 - 고대수
'대수'란 이름은 큰 대자에 형수 숫자를 써서 '큰 형수'를 의미했다. 키가 7척이나 되는 그녀를 큰형수란 뜻으로 부른 것은 말하자면 '여자 거인'이란 예기였다. 7척 키에 힘이 장사요 게다가 생김새가 지지리도 못난 흉물이었으니, 어느 모로 보나 '사랑스러운 여인'이라기보다 '징그러운 괴물' 쪽에 속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장기는 있었다. 여차하면 남자 오륙 명쯤을 들었다 팽개쳐 버리는 엄청난 힘 때문에, 그녀는 민비를 보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대궐 안의 무수리(잡역부)였으나, 그 때문에 민비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대수라는 놀림감으로밖에 대접받지 못한 그녀는 마침내 고라는 성을 하사받기에 이르렀다. 고대수는 40대의 무수리였다. 아니, 개화당의 중심 인물 김옥균의 <갑신일기>에 의하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1884년에 고대수가 42세였다니까 그녀는 어림잡아 1843년생이 된다. 7척 장신(2미터 10센티)인 고대수는 외로운 여인이었다. "젠장맞을. 옛말에 이르기를 흉물은 이 세상에 떨어지자마자 죽어 없앤다는데 어떻게 저런 흉물이 살아 남아서 대궐 안에까지 흘러 들어왔을까!" 내시들은 중전마마 민비의 총애를 받고 있는 거녀 고대수가 아무래도 눈엣가시격이었다. "소문을 듣자하니 고대수가 대궐에 들어오게 된 것이 뭐 궁무에 의해서라며?" "그렇다나 보더구먼. 아름답고 예절 바른 상궁 나인들 틈에 하나쯤 저런 기녀 거구가 있어야 한다고 했대." "육시랄! 저런 마누라가 행여 꿈에라도 걸려드는 날엔 꼼짝없이 압사 하겠구먼 그랴!" "옳은 말씀이야, 하하하하........" 고대수가 없는 곳에서는 이렇게 그녀를 화제 위에 올려놓고 시시덕거렸으나, 막상 고대수가 나타나면 그들은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빼었다. 내시들뿐만이 아니었다. 대궐 안을 순시하는 시위병들도 고대수와 만나면 겁이 나는지 고개를 돌릴 판이었다. 거구의 고대수는 몰골이 흉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힘이 세고 성질도 난폭했다. 그녀의 난폭한 성격은 외로움에서 싹이 트고, 외로움에서 반항적으로 행동되어 갔다. 누구 하나 그녀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가 없었고, 누구 하나 그녀를 한 사람의 여인으로 대우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밤낮으로 외톨이였다. 고대수는 실상 민비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고는 하나, 대궐 안에서 외돌토리였기 때문에 사람의 정이 그리워졌다. 고대수의 반항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은 말하자면 그 '외톨의 슬픔'에서 비롯된 셈이었다. 30대의 팽팽한 젊음을 중전마마 시중드는 나날로 다 보내고, 고대수가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자기 쪽에서 말을 걸어도 재수없다고 침을 밷다시피 도망쳐 가는 남자들이 태반이었는데, 어느 날 흉녀 고대수를 불러세우는 젊은이가 있었다. "고대수!" 문득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대수는, 아직 서른이 채 안된 젊은이가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는 데 놀랐다. "쇤네를 부르셨사옵니까?" "자네말고 이 자리에 누가 있는가?" 젊은이는 김옥균이었다. 전 부사 김병기의 양자로 1872년(고종 9년)에 문과 장원 급제를 한 김옥균은 사헌부의 지평(정 5품)과 홍문관의 교리 (정 5품)를 역임하였는데, 그 때만 해도 벼슬이 더 오르지 못하고 있던 때라 조정에 대해서 불만이 많은 젊은이였다. "나리께서 무슨 일로 쇤네를 부르시는지요?" "자네가 마음에 들었네!" 고대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에구, 우스개 말씀도 잘 하시네요. 나리 저 같은 흉물, 어디가 마음에 드셨다구 그러세요?" "이건 진담일세. 사람들 눈이 있으니까 저쪽 전각 처마 밑으로 가세!" 고대수는 젊은이가 이끄는 대로 전각 처마 밑으로 갔다. 이건 도무지 난생 처음 남자의 부름을 받는 처녀라 가슴이 두근거려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전각 처마 밑은 조용했다. "자네 이름이 뭔가?" "고대수, 에유 좀전에 저를 불러 놓으시구 그새 깜박 잊어먹으셨나오?" "아닐세. 내가 묻는 건 자네 본 이름이야." "모르겠어요, 하두 천하게만 살아와서 이름을 가져 본 일도 없어요." "자네가 하는 일이 뭐지?" "예, 중전마마 시중드는 일이에요." 김옥균이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을 하면서 그녀는 어느새 김옥균과 마음을 터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란다. '나 같은 무수리가 젊은 선비 양반하고 이야기를 나누다니, 게다가 여긴 대궐 안이 아닌가.' 참으로 생각만 하여도 자꾸만 가슴은 떨렸다. 어느 남자가 나를 사람으로 취급하고 말을 건네 왔던가, 생각하면 눈물이 찔금찔금 나올 판이다. 그날 김옥균과 수인사를 나눈 뒤로 고대수는 완전히 김옥균의 인품에 반해 버렸다. 그런 기분은 김옥균도 마찬가지였다. 김옥균은 고대수를 발견한 그날 밤으로 광교에 있는 스승 유대치를 찾아갔다. "대궐 안에 다리가 놓여졌습니다, 선생님." "남자인가, 여자인가?" "여잡니다." "여자.........?" 유대치는 의외라는 듯 놀란 모양이었다. "여자가 우리 일에 도움이 될까?" "틀림없이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선생님." "틀림없어?" "예, 틀림없이........." 김옥균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유대치가 말하는 '우리 일'이란 물론 개화당의 일로서 이른바 혁명이었다. 정치 변혁을 일으켜 새 정권을 만들겠다는 개화당의 목적에 고대수는 하수인으로 뽑힌 것이었다. "고대수에게 이르게, 대궐 안에서 어느 전각이 불을 지르기에 적당한가 살펴서 보고하도록." "알았습니다." 유대치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정변을 일으킬 때 미리 대궐 안 어느 전각에 불을 질러서 고종 임금을 놀라게 할 계획인 것이다. "대궐 안에서 불이 나면 조정 대신들은 곧 대궐로 달려가 상감마마에게 문안을 드리게 되어 있다. 이때에 대신들이 출입하는 문은 창덕궁 서문, 즉 금호문이니, 장정들을 금호문 밖에 세워 두었다가 대신들이 달려오거든 가차없이 해치워야 하이." 유대치의 계획에는 빈틈이 없었다. 개화당 인사들은 비밀리에 정변 일정을 잡아 놓고 거사를 진행시켰다. 거사 준비 과정에서 고대수가 해야 할 역할은 컸다. "그래, 폭약은 어디에다 터뜨리는 것이 좋겠는가?" 김옥균은 또다시 고대수를 은밀하게 불러 대궐 안이 동정을 물었다. "예, 폭약은 아무래도 통명전에서 터뜨리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건 어째서?" "통명전은 국상이 날 때만 사용하는 전각이라 평시에는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전각입지요."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허면, 통명전의 위치를 자네는 잘 살펴 두렷다!" "면심하겠습니다, 나리." 김옥균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고대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하루 몇 차례고 통명전의 위치며, 다른 전각과의 거리, 만일의 경우 통명전에서 폭약을 터뜨리다 발각이 되었을 때 몸을 숨기기에 알맞은 자리까지 물색해 두었다. 거사에 쓸 폭약은 이미 마련이 되었다. 2년 전 김옥균이 일본에 갔을 때, 개화당 소속의 탁정식을 시켜서 서양 사람한테 구입해 왔던 것이다. 고대수는 통명전에 불을 질러 그 폭약을 터뜨리기만 하면 되었다. 개화당이 내세운 혁명의 명분은 뚜렷했다. 첫째, 그 때까지만 해도 청나라의 속국으로 있던 현실을 타개하고 자주 독립국이 되자는 것. 둘째, 문벌을 없애고, 인민의 평등 권리를 제정하며, 능력 중심의 인재를 등용하자는 것. 셋째, 조세법을 개정하여 민주으이 빈곤을 막고, 궁중 중심의 재정에서 정부 중심의 재정으로 개혁하자는 것.
고대수는 무식한 무수리였으나, 개화당이 내세운 이와 같은 주장에 무조건 찬동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계급을 타파하고, 민권을 신장하고, 국정을 쇄신하겠다는 개화당의 의도가 마음에 들어 기꺼이 거사에 가담케 되었다. 고대수의 사고 방식은 아직도 유교 사상에 젖어 여성의 사회 진출이 전무했던 그 당시 사회 형편으로는 여간 큰 결단이 아니었다. 도대체가 여자란 남자 앞에서 얼굴을 제대로 들 수조차 없었던 시대에 양반집 젊은이들이 주동이 되어 모의한 일에 기꺼이 가담하겠다고 나선 것은 그야말로 혁명 정신이 없이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침내 거사 일정이 확정되었다.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설을 축하하기 위한 낙성식 잔칫날. 그날 밤을 이용하여 혁명을 일으키기로 모의는 끝났다. 첫째, 별궁에 불을 지르는 신호로 행동을 개시할 것. 둘째, 별궁에 불이 나는 것과 함께 수구당 인사를 처단할 것. 셋째, 민영익은 윤경순과 이은종이 말고, 윤태준은 박삼룡고 황용택이, 이조연은 최은동과 신중모가, 한규직은 이규완과 임은명이 각각 담당하여 처치할 것....... 일곱째, 궁녀 모씨(고대수)는 폭발약을 대나무 대롱 속에 넣어서, 밖에서 불이 나는 즉시로 국상이 났을 때 사용하는 통명전에 불을 지를 것. 개화당의 지시대로 고대수는 통명전에서 폭약을 터뜨렸다. 때마침 거사가 착착 진행이 되어 김옥균은 고종과 민비 앞에 있었는데, 시기를 맞춰 폭약이 터진 것이다. 고종과 민비는 놀라 뒷문으로 피신했다. 미리 짜 놓은 계획대로 윤경완이 왕과 왕비를 호위했다. 그러나 개화당의 이른바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청국과 일본이 개입으로 신내각까지 조직했던 개화당 인사들은 거사가 실패하자 모두 쫓기는 몸이 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유혁로, 신응희 등 개화당 인사들은 인천에 정박중인 지토세마루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으며, 미처 피신을 하지 못한 인사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참살을 당해야 했다. 고대수도 체포되었다. '대역지죄인'이란 표찰이 목에 걸린 고대수는 포승으로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육모전 거리로 끌려 나왔다. 혁명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성공을 하면 그야 영웅이 되지만, 혁명이 실패로 끝나면 대역 죄인이 되는 것. 포승줄에 묶인 고대수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군중 속에 떼밀려 육모전 거리로 나왔다. 고함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대역 죄수를 죽여라!" "저 흉물부터 돌로 쳐라!" 사람들은 성난 사자들처럼 피에 주린 이리뗴처럼 몰려들었다. 다른 '대역 죄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녀 고대수가 군중들의 주된 표적이었다. "저년이 통명전에서 화약을 터뜨렸단다. 상감마마를 놀라게 한 년이 바로 저년이야!" "중전마마 가슴이 얼마나 뛰었을까, 저년이 원흉이다!" "저 고대수부터 죽이자!" 성난 군중들은 흉물 거녀에게 달려들었다. 머리채를 낚아챘다.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옷을 찢어 맨살이 나오도록 할퀴었다. 고대수는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죽고 싶구나.' 할퀸 살갖에서 피가 흘렀다. 찢어진 옷을 헤치고 여자의 비밀한 곳까지 노출되었다. 그러나 양손이 뒤로 묶인 고대수는 부끄러운 곳을 가릴 염두도 내지 못하고 사뭇 끌려갔다. 혁명에 가담한 고대수의 결단과 용기는 민중 앞에서 여지없이 짓밟혔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부끄럽다거나 할퀸 살이 아프다거나 그런 감정은 지워진 지 오래다. 통명전 처마 밑에 폭약을 터뜨린 자신의 행동이 민중 앞에서 할퀴고 욕설덩이가 되어 날아와도 그녀는 그녀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식한 여인이었으나, 가슴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나는 죽어 가지만 내가 할 일은 다 했어. 새 나라를 이룩하는 데 부여된 임무를 다하고 죽는 게야.' 사실 고대수는 개화당 인사들이 개획했던 10여 조목의 행동 중에, 주요한 한몫을 실패없이 완수한 것이었다. 수구문 밖에 다다르자 그 곳에 모여 있던 민중들이 고대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할퀴고, 낚아채고, 물어뜯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형벌은 가해졌다. 돌팔매가 날아들고, 몽둥이가 후려치고........ 그녀는 쓰러지며, 이끌리며 흡사 개돼지처럼 다루어져서 급기야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 고대수의 입에서 비명인지 신음소리인지 분별키 어려운 짐승 소리가 새어나왔다. 쓰러진 고대수의 몸뚱이 위에 성난 돌덩이가 날아와 쌓였다. 결국 고대수는 돌덩이에 묻혀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 땅의 최초의 여성 혁명가인 고대수의 목숨은 이렇게 돌무더기 속에서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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