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5부 왕권과 여권
영특한 중전의 불행한 최후 -명성황후
민비는 본디 미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민비를 이야기할 때마다 여걸이란 칭호를 아낌없이 바쳐 오고 있다. 민비의 어떠한 면이 여걸스럽다는 얘기인가. 15세의 고종은 민비와 첫 인연을 갖던 날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이 상궁이 있는데.......' 말하자면 민비는 대궐에 들어온 첫날밤부터 왕에게 소박을 맞은 것이었다. '이럴 수가.......' 그러나 민비는 낙담하지 않았다. 고종이 사랑하고 있는 이 상궁은 민비에게 있어 사랑의 적이었으나 아직 궁중 생활에 익숙지 못한 민비는 아픔을 씹으며 참기로 하였다. 왕보다 한 살 위인 민비는 방년 16년. 친영례를 치르고 왕의 아내가 된 민비는 시아버지 대원군의 사랑이 두터웠으나 정작 사랑을 받아야 할 낭군 고종의 욍면을 받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외롭고 쓸쓸한 밤이 계속되었다. 왕은 여전히 전부터 정을 기울여 온 이 상궁과 친히 지낼 뿐이었다. 고종의 그 같은 생활은 실상 고종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나이 어린 왕이 열두 살에 입궁하여 마음을 쏟을 곳이란 아무데도 없었다. 친아버지 대원군은 대궐 안에 들어오면 조 대비를 만나 정사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었고, 궁 밖에 사는 어머니는 함부로 대궐 출입을 할 처지도 못 되었다. 타락한 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여색에 아주 빠져서 쇠약한 몸으로 후사를 보지 못한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드넓은 대궐 안에서 궁중 법도와 왕의 채통만을 내세워 고독하고 외롭게 내버려둔 것은 아무래도 잘못이었던 것 같았다. 어린 왕은 제 시중을 들어 주던 이 상궁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그 고마움은 이성간의 정으로 발전하여 급기야는 서로 육체적인 결합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 상궁은 소년 왕 고종을 성에 눈뜨게 하였다, 육체적인 결합이 안겨다 주는 쾌감으로 외로움과 고독을 잊게 하였다. 두 사람 사이는 날이 갈수록 가까워졌고 정 또한 두터워졌다. 이즈음 형식적인 삼간택을 거쳐 고종의 비가 된 민비가 들어왔으나 고종은 여전히 이 상궁에게 기울인 정을 거두어 들이려하지 않았다. 독수공방을 지키는 날이 늘어갈수록 민비는 기다림으로 응어리진 가슴을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시간으로 매워 나갔다. 고종이 민비의 방에 나타나지 않는 밤, 중전의 방에서는 밤이 깊도록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녀는 왕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대신 그녀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권력을 손에 쥐고 싶었다. 그러자면 무엇이든지 알아야 한다. 지식이 있어야 한다. 역사도 알아야 하고, 정치. 경제 분야도 알아야 하고, 사회 분야도 알아야 한다. 이이의 <맹자언해>도 읽어야 하고, <춘추좌전>도 알아야 한다......... 그녀의 식견은 날로 늘어갔다. 왕과의 사랑이 탐탁지 못한 탓일까. 중전은 어쩌자고 태기가 없었다. 시아버지 대원군은 왕자를 낳지 못하는 중전을 차츰 못마땅해하였다. 때마침 왕자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대원군 앞에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은 고종의 사랑을 받은 이 상궁의 몸에 태기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허헛, 과연 기쁜 소식이로다. 튼튼한 왕자를 낳을 수 있도록 이 상궁에게 보약을 먹이도록 하라." 대원군은 하루 속히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에 안절부절이었다. 민비는 누르고 눌러 왔던 질투심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주위의 모든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금껏 존경을 아끼지 않았던 시아버지 대원군이 이 상궁에게 보약을 먹이자 그녀는 그 때부터 시아버지를 외면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왕이 자기를 제쳐놓고 이 상궁이나 여러 후궁만을 총애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 난 다른 궁인들보다 가꾸기에 소홀한 것 같아. 다른 여자들이 몸단장 분단장 곱게 하고 마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밤마다 등불 아래서 책읽기에 몰두해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민비는 한 여인으로서, 지어미로서 지아비의 사랑을 받고 싶은 생리적인 욕망에 몸부림 쳤다. 민비는 그날부터 자기 몸을 가꾸기 시작했다. '아름답게, 요염하게........'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다짐했다. 중전으로서 왕을 보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아내로서, 여인으로서 남자에게 내조하고 봉사하려는 자각이 뒤늦게 눈을 뜬 것이다. 그 사이 이 상궁은 왕자를 낳았다. 왕의 발길을 자기 쪽으로 돌리려던 민비는 또다시 헛물만 켰다. 왕뿐만 아니라 시아버지와 조 대비도 왕자를 낳지 못한 자기보다 이 상궁 쪽을 더 귀애하고 있었다. 왕자는 곧 완화군에 봉해지고 머지않아 세자로 세우려는 움직임들이었다. 마음 속에서는 불 같은 질투가 일었으나 민비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현명하고 지모 있게 사태를 처리해 나갔다.
왕은 차츰 영특한 민비에게 인정어린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여인이 몸매가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깊은 교양과 세상을 보는 넓은 식견이 없는 여인의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왕이 이 상궁의 처소로 납시는 횟수보다 차츰 민비의 침방으로 나아가는 밤이 늘어갔다. '이때다. 왕을 내 사람으로 사로잡을 때는 바로 지금이야.' 애초부터 민비는 실상 왕의 사람이 아니던가. 3년 동안 왕의 버림을 받다시피한 무르익은 민비의 젊음은 왕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였고, 그 동안 서적을 통하여 익힌 견문과 지식은 왕을 놀라게 만들기도 하였다. 민비는 왕을 움직여 정치의 변화를 계획했다. 무엇보다도 머저 그 때까지 대원군이 어린 왕을 제쳐놓고 정치를 해오던 것을 바로 잡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며느리인 민비가 시아버지 대원군을 정치 일선에서 몰아낸다는 엄청난 계획이었다. 왕은 민비의 계획에 찬동하였다. 왕의 나이 이미 스물두 살이 아닌다. 영특한 민비의 내조라면 능히 정사를 다스릴 자신이 있었다. 그 무렵 대원군은 백성들이나 조정 대신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었다.
-대원군은 서양 문물을 배격하는 쇄국주의자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 너무 많은 재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재원 확보를 위해 소위 원납전을 너무 과다하게 거둬 들이고 있다. -대원군은 당백전을 만들어서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대원군은 천주교를 박해하고 더욱 큰 원성을 듣고 있다.......
그러한 원성을 백성의 원성으로 확대하여 대원군을 권좌에서 내어쫓자는 게 민비의 속셈이었다. 대원군의 실정에 대한 대신들의 감정이 좋지 않은 때에 민비의 치밀한 계획은 차츰 무르익어 갔다. 때를 같이하여 완화군의 돌날이 지나자 서울 장안에는 또 하나의 소문이 나돌았다. "민비가 완화군의 돌날 아기를 독살시켰다면서?" "어쨌든, 완화군이 죽은 것만은 틀림없다네." 민비는 이 상궁이 낳은 아들을....... 그것도 세자로 책립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을 때 제거해 버린 것이 여간 통쾌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상궁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마마, 이 상궁이 외간 남자와 밀통했다 하옵니다......." "밀....... 밀통이라면 외간 남자와 침방에서......." "그렇사옵니다. 당장 대궐 밖으로 쫓아내시옵소서, 마마." "흐음." 왕으로서는 민비 이전에 모든 정을 바쳐 오던 여인이었으나 외간 남자와 사통했다는 데는 미련이고 뭐고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은 즉시 이 상궁을 궁 밖으로 내쫒아 버렸다. 이제 대원군만 몰아내면 되었다. 민비는 얼마 전 완화군의 세자 책립 문제를 청국의 힘으로 막으려 했던 일이 있었다. 민비는 동지사로 떠나는 이유원에게 대원군이 권세를 독차지하여 제 마음대로 휘둘러 조선의 정치가 위태롭다는 이야기를 청나라 총리 대신 이홍장에게 알리라고 했었다. 마침 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던 이유원은 민비가 보내 준 예물을 올리고 이홍장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민비는 조정 안에 자기 세력을 심어 나갔다. 민비의 오라비들과 조 대비의 조카 조영하, 조성하, 그리고 안동 김씨로 김병기, 김병국, 더욱이 대원군의 형 이최응과 왕의 형 이대면까지도 이 다음에 적당한 감투 벼슬을 준다고 설득하여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으나 이들이 모두 민비의 추종자들인 셈이었다. 이즈음 민비는 대원군에게 아주 떳떳하게 대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고종의 비로 들어온 지 5년 만에 그녀는 잉태를 하였다. 대원군은 5년 동안 아기를 갖지 못하는 민비에게 온갖 푸대접을 다 해왔는데 이제 그녀는 시아버지 앞에서 한 여자로서도, 며느리로서도 떳떳해진 셈이었다. 마침내 고종 8년, 민비는 첫 왕자를 낳았다. 민비는 산고의 아픔도 잊고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곧 깨어져 버렸다. 왕자가 대변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손주의 건강을 위해 산삼을 구해 달여 먹이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죽고 말았다. 대궐 안에서는 민비의 아들이 죽자 괴이한 소문이 나돌았다. "대원군이 왕자를 죽이려고 산삼에 독을 넣어 들여 보냈단다." 왕자를 잃은 민비는 그 소문을 그대로 믿고 전보다 더 시아버지 대원군을 증오하게 되었다. 세상은 날로 어수선해 갔다. 고종 10년 여름이었다. 일본의 정객들은 정한론을 펴고, 조선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것은 대원군의 쇄국주의 정책으로 일본과의 수교를 배격한 데서 빚어진 사태였다. "옳아....... 시아버님을 내쫓을 때는 바로 지금이야." 민비는 부승지 최익현을 움직여 대원군을 배척하는 소를 올리게 하였다. 대원군의 실정을 들어 통렬하게 비판하고 나서자 대원군은 자기의 권세가 막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마침내 대원군은 10년 동안 아들 고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보아 오던 것을 거둬 들이고 뒤로 물러앉고야 말았다. 대세는 완전히 민비와 고종 쪽에 기울어 있었다. 대원군은 양주군 직고산 속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쉽사리 정치 일선에서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산속에서 며느리 민씨 일파를 타도할 궁리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조정은 민비파와 대원군 추종자들로 갈려져서 보이지 않는 암투를 계속했다. 12월 10일 밤의 일이었다. "에이그머니나......." 민비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침전 밖으로 뛰쳐 나갔다. 민비의 침전에서 자기황이 터져 불이 일어났던 것이다. 불은 자경전과 순회당, 자미당 등 400여 평을 태워 버리고 꺼졌다. "흥, 이번 일은 시아버님 패거리가 저지른 짓이야......" 민비는 그 때부터 대원군과 내통할 만한 인물들을 경계하며 전보다 더 엄한 감시를 하였다. 민비는 그와 함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행하던 경과란 과거를 자주 시행하여 자기파 자제들을 다수 급제시켰다. 게다가 민비는 굿에 미치다시피한 왕비였다. 이름도 없는 무당 이씨란 여인을 진령군이란 칭호를 주어 권력을 뒤흔들게 하였다. 왕자를 위한 굿이라 하지만 궁 안에서는 연일 굿거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국고가 쓸데없는 굿거리를 위해 바닥이 날 판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명산 대찰을 찾아 기도를 올리게 하고, 재정이 달리자 호조의 재정까지 이 기도와 굿을 위해 썼다. 각 고을의 재정에도 손을 대어 나라 안의 재정은 민비 마음대로 긁어다 썼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흉흉해 갔다. 민비의 척신 민승호가 민비의 국고 탕진을 막지 않았다는 비난도 나돌았다. 아니, 민승호를 때려 죽여야 한다는 비난도 나돌았다. 아니, 민승호를 때려 죽여야 한다는 격앙된 유언비언가 나도는 실정이었다. 1874년 11월 28일, 민승호의 집에는 선물 보따리 하나가 들어왔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선물을 풀어 보던 민승호는 선물로 위장된 폭발물이 터지는 바람에 가족이 몰살을 당했다. 외세의 물결은 거침없이 들어왔다. 병자 수호 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의 문물은 개화란 이름으로 걷잡을 새 없이 밀고 들어온 것이다. 마침내 고종 18년, 임오년 6월이였다. 선혜청 창고에서 배급을 받던 군인들은 쌀에 모래가 섞어 나오자 기어코 폭발하고 말았다. 군란이 일어났다. 표적은 국고를 탕진한 민비에게 쏘렸다. "민비를 내놓아라!" "민비를 죽이자!" 이른바 임오군란으로 불리게 된 이 폭동은 대원군의 재집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민비는 혼란한 틈을 타서 시녀 복장으로 갈아입고 몰래 대궐을 빠져 나갔다. 폭동은 곧 진압되었고, 집권한 대원군은 민비의 행방을 찾았다. "민비는 죽었다." 그러한 소문이 꼬리를 이었다. 민비의 죽음으로(?) 국상이 발표되자, 백성들은 백립을 쓰고 목을 놓아 슬피 울었다. 그러나 민비는 죽지 않았다. 그녀는 충주 장호원에서 재기의 칼을 갈고 있었다. 청국과 일본은 서로 조선을 돕는다는 구실로 군대를 투입했다. 대원군은 청국이 보호한다는 구실로 납치해 갔다. 민비는 다시 장호원 촌가에서 대궐로 돌아왔다. 민비는 대원군을 밀어내고 정권을 한 손아귀에 쥐어 넣은 셈이었다. 민비와 대원군의 싸움은 결국 수구당과 개화당의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각기 외국 세력을 등에 지고 자파의 득세를 위해 전전긍긍하였다. 개화당은 급기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3일 천하로 끝났다. 조정의 실정에 견디디 못한 민중들이 동학란을 일으키자 뒤이어 청일 양국이 충돌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청국의 승리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민비는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러시아를 등에 업고 권력 확산에 부심하였고, 대원군은 여전히 청국의 주구 노릇을 하며 권조중래의 기회를 노렸다. 이들 두 나라 틈바귀에 끼인 일본은 저들 나름으로 조선 강토에서 확고부동한 세력을 심어 놓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이 무사 출신 미우라 고로를 조선 공사로 내보내자 이자는 친일파 정객을 푸대접한 민비를 제거하려 들었다.
고종 32년 을미 8월 20일. 미우라 일본 공사는 일본의 낭인(건달패)들을 이끌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갔다. 대궐 안은 삽시간에 일본의 폭력배들로 가득했다. 민비는 침전에서 뛰어나와 궁녀 옷으로 바꿔 입고 대궐을 빠져 나갈 궁리에 마음이 급했다. 폭도들은 대궐 안이 아무나 붙잡고 민비의 소재를 물었다. 많은 궁녀들 속에 끼인 민비는 그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 앉았다. 때마침 시녀들 속에는 일본인 시녀 오가와가 끼어 있었다. "민비가 누구냐! 민비는 어디 있느냐!" 폭도들이 칼을 뽑아 들고 위협하자 오가와는 앞에 서 있는 민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본인 폭도들은 한 칼에 민비의 목을 쳐서 시해하고 석유를 뿌려 화장해 버렸다. 그리하여 민비는 45세의 한창 나이로 여걸스런 생애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