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4부 창업의 새 아침
여왕이 불밝힌 통일의 전야 -선덕 여왕
진평왕은 좌우 대신들을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연방 기쁨의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자리에는 전에 없이 왕의 장녀인 덕만 공주도 나와 있었고, 왕비 마야 부인도 나와 있었다. 왕은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앞에 놓고 대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런데 아직 나이 어린 덕만 공주가 한참 동안 모란꽃 그림을 감상하고 나더니 진평왕을 바라보고 자기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바마마, 이 모란꽃 씨를 뿌려서 꽃이 피어도 꽃에는 향기가 없겠나이다." "그러냐? 엇허허허, 어째서 이 꽃에는 향기가 없다는 게냐?" 왕은 귀여운 공주의 의견이 기특하게 생각되었다.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에 관심을 보이는 공주는 그만큼 어른스러워 보이기까지 하였다. 모란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라는 덕만 공주 말에 대신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되었는지 공주 쪽을 바라보았다. "이 그림을 보옵소서, 아바마마." "그래, 그림에 무슨 잘못된 점이라도 있다는 얘기냐, 공주?" "그렇사옵니다. 당나라에서 보내온 이 모란꽃 그림은 매우 아름답게 그려졌지만, 그림 안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을 보니 앞으로 씨앗을 뿌려서 모란꽃을 가꾸어도 향기가 없겠나이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놀라워하였다. 왕은 더욱 공주가 사랑스러워서 연방, "엇허허허, 공주의 생각이 그럴듯하구나. 엇허허허........" 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덕만 공주는 조금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지 말을 이었다. "무릇 여자로서 나라 안데 제일가는 국색이면 남자들이 색에 흘러 빠지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들이 따르는 법 아닙니까? 거듭 아뢰옵니다만 당나라에서 보내온 이 모란꽃이 아주 아름답기는 하오나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겠나이다." 두 번씩이나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공주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왕은 곧 모란 씨앗을 뿌려 꽃나무를 가꾸어 보라 일렀다. 과연 모란꽃이 탐스럽게 피었으나 덕만 공주의 말대로 그 꽃은 향기가 전혀 없었다. 덕만 공주. 뒷날 선덕 여왕이 된 그 덕만 공주는 이렇듯 어릴 때부터 모든 일을 판단하는 식견이 명석하였다.
신라 제 26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덕만 공주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사리에 밝고 민첩하였다. 진평왕이 대를 이을 왕자가 없이 돌아가자 나라 사람들은 덕만 공주를 임금으로 세우고 성조황고라는 호를 올렸다. 신라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상 이례적으로 여왕이 된 선덕은 신라의 귀족 성골 출신이었다. 여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이웃 백제와 고구려의 세력을 견제해 가며 이른바 삼국 통일의 초석을 다졌다. 여왕 5년(636년) 5월의 일이었다. 두어 달 전부터 여왕은 병환이 나서 치료를 받아오고 있었으나 이렇다 할 효력이 없자 황룡사에다 백고좌를 열어 중들이 인왕경을 강독하는 등 경황이 없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나라 안에 변고가 일어난 것이었다. "변고라니,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이오?" 여왕은 아직도 쾌차하지 않은 몸을 일으켜 왕 앞에 나타난 대신을 바라보았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하도 기이한 일이라 아뢰지 않을 수 없나이다." "글쎄 슨 일인지 냉큼 말하오." "궁성의 서쪽 옥문지에 두꺼비와 개구리떼가 모여 들었나이다, 마마." "두꺼비와 개구리떼가?" "예, 마마. 실로 기이하고 불길한 일이라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줄 아뢰오." 여왕의 심상치 않은 분부가 떨어지자 군신들은 하던 일을 제쳐놓고 달려왔다. "경들은 들으시오. 옥문지에 떼지어 나타난 두꺼비와 개구리떼는 참으로 흉한 징조이니, 지금 곧 알천과 필탄 두 장군은 궁성 서남쪽에 있는 여근골 이라는 데로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적을 토평토록 하오." "적이라니오, 마마?" "필시 그 곳에 가면 적병이 잠복해 있은 터이니 사각을 다투어 달려가도록 하오." 알천과 필탄 두 장군은 무슨 영문인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어떻든 적이 나타났다는 데는 시각을 지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여왕이 지시한 대로 여근골에 가 보니 과연 백제 군사 500 명이 그 곳에 와서 복병을 설치하고 있었다. 신라 군사는 알천, 필탄 두 장군의 작전 지시를 받아 백제 군사를 남김없이 잡아 죽였다. 알고 보니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지금의 충주와 괴산 부근)을 치기 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숨어 있었던 것이다. 두꺼비와 개구리떼가 모여든 것을 보고 적병이 잠입해 왔다는 것을 알아낸 선덕 여왕은 그 같은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었는지 궁금해 하는 군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옥문이라는 함은 곧 여근(여자의 중요한 곳)이란 뜻이요, 내 일찍이 여근골이라는 곳이 궁성 서남쪽에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적병은 반드시 그 여근골에 있음을 알겠으며, 또한 개구리나 두꺼비는 성낸 눈을 가졌으므로 곧 적병이 왔음을 알겠으며,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여근이 죽는 법임은 음양의 이치이니 적병을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도다." 듣고 있던 남자 대신들은 남근이니 여근이니 하는 은근한 비유로 적병이 신라 영토 안에 들어왔음을 알아낸 여왕의 기지에 탄복하고 얼굴을 붉히며 혀를 내두를 따름이었다. 여왕이 보위(왕좌)에 오른 지 오륙 년 동안은 분황사를 완공하고 각 고을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등 제세와 치적에 힘쓰며 대평성대를 구가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라 안팎 사정은 늘 선덕 여왕 편만은 아니었다. "이런 변이 있나. 칠중성(지금의 경기도 적성) 남쪽에 있는 큰 돌이 저절로 35보나 옮겨 앉았다는군." "돌이 저절로 옮겨 갔다? 35보나?" "그렇다니까." "흉조로고." 흉한 징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노란 비가 내렸다네, 이번엔." "노란 비라니?" "꽃과 같은 노란 비가...... 저 봐. 여기에도 지금 내리고 있잖은가!" 스스로 옮겨 간 돌. 노란 비. 언젠가는 또 크기가 밤알만한 우박이 내리질 안았던가. 선덕 여왕은 지난번 우소의 백제 군사 500여 명을 섬멸시킨 공으로 대장군에 오른 알천을 급히 불러들였다. "장군은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칠중성에 나아가 적을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시오." 여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머지않아 고구려 군사가 칠중성을 노리고 침공해 올 줄을 알았던 것이다. "칠중성 남쪽에 있는 돌이 저절로 옮겨 앉았다 함은 고구려의 군사가 남침을 하여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함이니, 오래지 않아서 침공해 올 고구려 군사를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섬멸시키도록하오." 여왕의 예감이나 판단은 언제나 정확했다. 선덕 여왕 7년 10월, 기어코 일은 터지고 말았다. "전하, 급보를 아뢰옵니다." "말하오." "고구려 군사가 마침내 칠중성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하옵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었다. 대장군 알천의 군사가 이미 적을 맞아 싸우기 위해 왕성을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알천 장군은 사방으로 도망가는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칠중성 밖에서 고구려 군사와 격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이 무렵 신라, 백제, 고구려 등 3국을 포함하여 동양 여러 나라에서는 전쟁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등장하여 한반도의 여러 나라를 기웃거렸고, 신라의 북쪽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나타나 영류왕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는가하면, 신라의 서쪽에 자리잡은 백제는 호탕한 의자왕이 왕위에 올라 신라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때마침 동해 바닷물이 붉게 끓어올라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라 안은 다시금 술렁거렸다. 미구에 무슨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아니나다를까, 백제 의자왕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로 쳐들어왔다. 적지에서는 속속 불행한 소식만이 날아들었다. "우리 신라의 서쪽 지방 성이 10여 개나 적의 수중에 들어갔나이다." 그런 보고가 있던 것은 그나마 싸움을 시작한 지 얼마 뒤의 일이었다. 날이 갈수록 신라군 전지는 사기를 잃어갔다. "40개 성, 실로 나라의 위기로다." 선적 여왕 11년 7월, 녹음을 틈탄 백제군은 신라 영토를 침범 40개 성이나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2월에 또다시 의자왕은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당나라로 가는 지름길인 당항성(지금의 수원 서쪽 남양)을 쳐서 차지하였다. 일은 참으로 급박했다. 여왕은 즉각 당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고 방책을 구했다. 그 사이 백제군은 또다시 장군 윤층을 보내어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공격해 왔다. 전지에서는 여전히 비보가 날아들었다.
-대야성이 함락되었다. -도독 김품석 장군이 전사했다. -죽과 용석이 전사했다. -춘추공의 딸(품석의 아내)도 함께 죽었다.
여왕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찬 김춘추를 불러 들었다. 자기 딸이 죽었다는 비보에 접하고 김춘추는 기둥에 의지하여 서서 종일토록 눈도 깜박이지 않고 비통해하다 대궐로 들어갔다. "마마, 대야성의 원수를....... 기필코 대야성의 원수를 갚겠나이다." 김춘추는 어전에 꿇어 엎드려 다시 울부짖었다. 나약하기 쉬운 여왕의 눈에서도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찬, 어떻게 해야 원수를 갚을 수 있을지 말해 보오." "신이 원하옵기는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여 백제를 치는 것이 어떠할까 하옵니다." "좋은 생각이오. 고구려도 우리 신라의 적국이나 장차 백제를 치기 위해서는 고구려와 손을 잡지 않을수 없구려." 여왕은 김춘추가 고구려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장왕은 '죽령은 본디 우리 땅이니 신라가 만약 죽령 서북 지방을 돌려보낸다면 군사를 내어 신라를 돕겠다.'고 나왔다. 결국 김춘추의 고구려행은 실패로 끝나 보장왕은 김춘추를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이에 김춘추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자 여왕은 대장군 김유신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김춘추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 보장왕은 이 말을 듣고 겁이 나서 김춘추를 돌려보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선덕 여왕은 장차 고구려를 쳐서 통일시킬 것을 결심하였다. 여왕은 재위 12년 1월에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그 뒤에 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백제를 치기 위한 군사를 청하였다. 선덕 여왕은 왕위에 오른 지 16년 만에 삼국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여왕이 계획한 통일의 의지는 그 뒤 진덕 여왕을 거쳐 태종 무열왕대에 이르러 기어코 실현을 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