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6장 예술, 그 광기와 죽음
불행한 가계의 화가 - 로트렉 / 반 고흐
앙리 토루즈 로트렉(1864∼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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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t Willem van Gogh 185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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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센티미터의 단구 로트렉 로트렉은 남프랑스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혈족혼인으로 인하여 로트렉은 약한 체질을 유전받게 된다. 너무나 병약하여 학교를 퇴학하고, 열 살부터 어머니의 지도로 공부를 하게 된다. 14세에 자택 응접실 마루에 넘어져 왼쪽다리가 골절되고, 그 이듬해는 산보하다가 도랑에 빠져 또 오른쪽 다리의 대퇴골이 부러졌다. 두 다리의 골절에도 상체는 정상이었으나 하체는 발육이 정지되어 기형적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137센티미터의 난쟁이였다. 육체적 핸디캡을 잊으려고 그는 술을 마셨고 마침내 알코올 중독으로 요절하게 된다. 그는 모델들이나 창녀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그 중에서도 최초의 모델이었던 쉬잔느 발라동은 그의 애인이었다. 미인이던 발라동은 뒷날 화가가 되었으며, 유트릴로를 낳은 어머니이기도 하다. 발라동이외에도 여러 창부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이 무렵 얻은 성병은 그의 단명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몽마르트의 카페 물랭루즈, 꽁세르나 카페 샹땅 등은 그의 예술의 고향이며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 술집의 분위기, 거기에 펼쳐지는 풍속들, 춤추는 무희, 흥청거리는 카페 한 구석에 앉아, 그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을 화판에 담고 있었다. 그 자신이 불구자였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니었을까? 그는 레슬링하는 그림과 말을 많이 그렸다. 프로 레슬러들이 가진 튼튼한 육체에 대한 열망과 말들이 가진 튼튼하고 긴 다리에 대한 동경을 그림에 담았다. 그는 특히 드가를 좋아했는데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소재가 같았다. 카페, 서커스, 경마장, 극장무대, 무희. 약동하는 인물의 포즈나 생생한 생동감을 스냅쇼트적으로 정착시키고 있었다. 그들 둘은 자연과 태양의 세계를 떠나 인공적인 빛의 세계를 택했다. 그들의 관심은 동적, 유기적, 인간적인 것에 있었다. 그러나 드가는 욕실 속의 나부 를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여 정확한 관찰자로서 그린 데 반해 로트렉은 애정을 가지고 대상을 지켜보면서 느껴지는대로 그리는 인간미 넘치는 화가라는 차이가 있다. 인상파 화가는 색의 화가 라고도 한다. 로트렉은 선의 화가 였다. 그만큼 소묘에 뛰어난 화가였던 것이다. 그는 앙보와즈가와 물랭가의 매음가를 드나들며 50여 점이나 되는작품에 창녀들을 그렸다. 창가에 있을 때가 제일 마음 편하다 던 로트렉에게 창가는 그의 집이자 아뜨리에였던 것이다. 1899년 2월, 그는 물랭가의 한 창가에서 의식을 잃고 만다. 서른 다섯 살 때였다. 그 해 겨울 로트렉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나는 갇혀 있습니다. 이렇게 갇혀 있을 바엔 죽어 버리고 말겁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다. 열두 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에 자유를 빼앗긴 자는 금방 죽어 버리게 되는 것 이라는 말과 우연히 일치되고 있었다. 파리의 매스컴들은 로트렉의 입원을 방탕, 주벽, 광기 로 풀어 보도했다. 그는 그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병실에서 기억을 더듬어 서커스에서 라는 39점의 색연필 소묘연작을 그려나갔다. 몇 개월 뒤, 안정을 되찾아 퇴원했으나 그의 음주벽은 더욱 심해졌고 따라서 건강도 더욱 악화되었다. 나중에는 술로 인해 다리마저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마비된 다리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로 회복이 되었으나 이번에는 화가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손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로트렉은 어머니가 계신 말로메로 가서 요양을 받았다. 다음 해 4월, 죽음을 가까이 자각하게 된 로트렉은 그야말로 남은 시간을 아껴가며 그림에만 몰두한다. 8월 20일, 다시 발작이 일어났다. 보드레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어머니 곁에서 죽기를 바랬다. 1901년 9월 9일, 새벽 2시에 어머니와 친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고흐가 죽은 나이와 똑같았다. 그는 이렇게 자주 말했다고 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아.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더라도 난 결코 그림따윈 그리지 않았을 거야.
죽음에서 조차 정다웠던 반 고흐 형제 동시대를 살면서 똑같이 3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로트렉과 반 고흐. 이 두 화가는 정신질환에 시달리면서도 많은 걸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네덜란드 태생의 반 고흐는 약 840점의 유화와 수많은 데생을 남겼는데, 이것은 모두 그가 죽기 전 10년 동안에 제작된다. 고흐는 16세 때부터 백부의 화랑에 근무하면서 그림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림에 뜻을 두게 된 것은 그가 보리나쥬 탄광지대에서 노동자들의 처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나서이다. 이것을 그대로 묘사해서 전 인류앞에 고발하려는 의욕에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데생공부를 시작한 것은 27세 때였다. 33세가 되자 그의 신경과민증세가 더해졌다. 동생 테오의 보살핌으로 몽마르트로 옮겨왔다. 그러나 그는 로트렉 등 인상파 화가들과 어룰리면서 음주와 퇴폐적인 생활로 점차 건강을 해치게 된다. 35세, 파리를 떠나 아르르역 근처, 마르티느 광장에 있는 노란 색을 칠한 이층집을 빌린다. 방안을 온통 해바리기 작품으로 장식해 놓고 그가 존경해 마지 않는 폴 고갱을 초대하였다. 두 사람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갱과 반 고흐의 화품은 서로 조화될 수 없었다. 고갱을 찌르려고 했던 칼로 고흐는 자기의 귀를 싹둑 잘랐다. 광적인 이 사건을 계기로 두 달 만에 파국을 맞아 고갱은 유럽으로 떠났고 고흐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그는 자신의 발작이 석 달 만에 한 번씩 찾아오는 주기성 발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발작 주기인 3개월이 다 되기 48시간 전부터 침대 주위에 커튼을 내리고 건강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그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발작 주기가 가까워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걱정할 필요가 없군, 페리롱 의사가 틀렸어. 이렇게 누워 시간을 허비하다니 원, 내일 아침엔 일어나서 작업을 해야겠군. 그러나 그날 밤이었다. 모든 사람이 잠들어 있는 시각, 그는 맨발로 석탄이 저장된 지하실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석탄가루를 한움큼 퍼내어 자신의 얼굴에 문지르며 중얼거린다. 드니 부인, 사람들이 이제 나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나도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들이 전에는 날 불신했지만 이젠, 나도 시커먼 아가리 예요. 이번에는 광부들도 내가 신의 말씀을 전하도록 허락해 줄 겁니다. 사람들은 동이 튼 직후에야 지하실에서 빈센트를 찾아냈다.
1890년 고흐는 자살하기 직전까지 2년 동안 모두 네 차례의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생 레미병원을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그가 돌아온 것을 환영하기 위해 많은 친구들이 테오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로트렉이 들이닥쳤다. 6층까지 올라온 탓에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그는 여전히 쾌활하였고 여전히 험구였다. 빈센트 악수를 하면서 로트렉이 외쳤다. 지금 층계를 올라오다 장의사를 지나쳤는데, 그 장의사가 당신을 찾고 있던 것이겠소? 아니면 나를 찾고 있던 것이겠소? 그야 로트렉 자넬 찾고 있었던 거지! 장의사가 나한테 별 볼일이 있을리 없거든. 고흐의 대답이었다. 당신한테 자그만한 내기를 걸지요. 장의사의 장부에 당신 이름이 내 이름보다 앞에 나온다는 것에 말이오. 좋아 그런데 뭘 걸지? 카페 아텐에서의 저녁식사와 오페라 관람. 둘이 좀, 섬뜩한 농담을 주고 받지 않았으면 좋겠군. 테오가 보일락말락 미소지으며 말했다.
열한 살이 더 많았던 고흐는 자살함으로써 그날 로트렉의 말이 맞았음을 입증해 보인 셈이 되었다. 테오는 형을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쉐에게 부탁했다. 가쉐는 의사인 동시에 아마추어 화가여서 고흐를 진심으로 환대하였다. 형을 잘 지켜봐 주십시오. 병이 닥칠 징후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즉시 저한테 전보를 쳐 주세요, 내가 형과 함께 있어야만이. 물론 자네 형이 미치긴 미쳤지. 하지만 자네가 어떻게 하겠어. 예술가들이란 모두 미친 사람들인 걸. 그게 그들이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점이거든. 난 그런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네. 가끔씩 나도 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지. 뛰어난 영혼에는 예외 없이 광기가 섞여 있다 이게 누구의 말인줄 아나? 아리스토텔레스지.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네.
가쉐와 함께 있는 석달 동안에 고흐는 80여점 이나 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 그림은 다만 한 점이 팔렸을 뿐이다.
어젯밤 텔레비젼에서 나는 그의 작품 프로방스의 농부 가 영국의 어느 경매장에서 126억원에 팔렸다는 보도를 보았다. 이런 기회가 단 한 번만이라도 그의 생전에 주어졌던들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결혼하여 아들까지 둔 테오의 경제 사정은 말이 아니게 나빴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흐는 자신의 병 때문에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칠월에 발작이 닥치면 자신이 뭔가 미친 짓을 저질러 불쌍한 테오로 하여금 더 많은 근심과 더 많은 돈을 치르게 할지도 모른다. 간신히 보내 준 50프랑으로 거의 7월 말까지는 지낼 수 있으련만, 그러나 그 뒤엔 어떡한다? 10년이나 형의 뒷바라지를 해온 테오에게서 돈을 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고흐는 잘 알고 있었다. 7월 하순 야외 스케치를 할 때였다. 불붙는 듯한 태양이 머리위를 내려쬐고 있을 때, 돌연 검은 새 떼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왔다. 어둡게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에서 그는 죽음을 예감했다. 고흐는 제작을 계속하였다. 노란 밀밭 위를 날으는 검은 새떼를 그렸다. 1890년 7월 27일. 머리 위엔 태양이 빛나고 있었고 그는 외톨이인 자신의 입장이 그날따라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는 없지. 그럴 수는 없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권총을 옆구리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피를 흘리며 몇 시간을 땅 위에 누워 있었다. 주머니엔 동생 테오에게 부쳐질 그러나 채 끝맺지 못한 652번째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의사 가쉐가 달려오고 전보를 받은 동생 테오가 마차를 타고 오베르로 질주해 왔다. 고흐는 아직 죽지 못한 채,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다. 아, 테오야. 빈센트가 말했다. 테오는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서, 어린아이 안듯 양팔로 형을 껴안았다. 그는 말할 수가 없었다. 가쉐 의사가 오자 테오는 그를 바깥 복도로 데리고 나갔다. 가쉐는 서글프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망이 없네.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할 수가 없어, 너무 쇠약한 상태야. 그 기나긴 낮 동안 테오는 빈센트의 손을 꼭 쥔 채, 줄곧 그의 침대가에 앉아 있었다. 밤이 내리고 방안에 단 둘만 남게 되자, 형제는 브라반트에서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조용히 나누기 시작했다. 새벽 한 시가 조금 자났을 때, 빈센트가 약간 고개를 돌리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테오,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몇 분 뒤 그는 두 눈을 아주 감아 버렸다. 7월 29일이었다. 테오는 형이 자기에게서 영원히 떠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불과 반 년 후, 오베르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작은 공동묘지,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 옆에 테오도 와서 나란히 묻혔다. 묘지 주위가 온통 해바라기로 둘러 싸였는데 그것은 고흐를 숭배하던 의사 가쉐가 심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무덤에서조차도 정다웠다. 테오의 삶이 그의 형보다 더 우울하였을 것 라고 말한 것은 그도 재발성 우울증으로 정신병을 앓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누이 빌헬르미나는 거의 40년간을 정신병원에서 지냈고 동생 코넬리우스도 자살을 하였다. 빈센트가 말한대로 그의 이모는 간질병 환자였고, 그 외에도 문중에는 환자가 많았다고 한다. 불행한 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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