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성군일 수 밖에 없었던 임금 -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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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강희황제, 러시아의 피터대제를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함께 대제 혹은 성군 으로 꼽고 있으나 어찌 우리나라 세종대왕에 비할 수 있으랴. 세종은 1397년 5월 15일, 태종의 세 번째 왕자로 출생하였다. 충녕대군에 봉해진 그가 폐위된 양녕대군의 세자 자리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22살, 그리고 32년간을 재위에 있으면서 여러 방면으로 이룩해낸 그의 업적은 실로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종은 보국안민에 최선을 다하였다. 할아버지 태조가 터를 닦고, 아버지 태종이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렸다면 자신이 해야할 일은 지붕을 덮어 집을 완성하는 일임을 그는 알았다. 더구나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해 치러진 많은 희생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루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아버지(태종)은 양녕대군과 가까운 외삼촌들을 사전에 모두 제거해 버렸다. 이때문에 어머니 원경왕후는 아버지와 원수같이 지냈다. 태종은 외척견제를 위해 또 한번의 옥사를 벌여 세종의 장인이던 심온마저 역모죄로 몰아 죽였다. 이 때문에 세종은 아내 심씨, 소헌왕후에 대하여도 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세종은 이러한 아버지의 엄호를 받으면서, 가족들의 피눈물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훌륭한 임금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런 부담과 여러가지의 콤플렉스가 그의 마음 밑바닥에 자리가고 있었다. 세종은 어릴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어질고 총명하여 국내의 정치는 물론 외교, 문화, 국방 등 여러방면으로 노력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갔다. 즉위 초 정음청을 설치하여 마침내 훈민정음(한글) 28자를 창제하고, 1445년 이를 전국에 반포하였으며 젊고 유망한 학자들로 하여금 집현전에서 학문을 연구하게 하고 활자를 개량하여 많은 책을 펴냈는데 이 방대한 문화사업이 문화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왕은 친히 <월인천강지곡>을 짓고 <용비어천가><농사직설><고려사><삼강행실도><석보상절> 등의 책을 펴냈으며, 불서 번역도 활발히 하였다. 천문학의 연구를 위해서 서운관을 설치하고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었으며, 박연을 시켜 아악을 정리케 하고 군사에 있어서도 김종서를 시켜 6진을 개척케 하였으며 압록강 방면으로 4군을 설치하여 국토의 확장을 꾀하였다. 어느 것 한가지에도 소홀함이 없는 정말 대내외의 눈부신 치적을 쌓았던 것이다.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정사에 워낙 무리하였기에 몸에 병이 많았다. 30대 중반에 풍병을 앓으면서 <삼강행실도>와 <팔도지리지>를 만들었고, 40대 초반에 당뇨병을 앓으면서 해시계와 자격루를 제작했다. 훈민정음은 안질이 심하여 반 실명한 상태에서 창제되었다. 그 밖에도 수전증, 허손병에 대한 언급과 한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와 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세자에게 섭정을 시켰다. 당시 세종의 나이는 마흔 일곱, 한창 나이인데 몸에는 여러 가지의 병의 뿌리가 깊었다. 54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여섯 부인에게서 18명의 왕자와 4명의 딸을 두었는데 자손때문에도 고초가 많았다. 열세 살 난 맏딸, 정소공주를 잃고 세종이 친히 지었다는 제문을 보면 가슴이 저리다. 그는 48세 되던 해, 두 아들을 또 잃고, 이듬해에 소헌왕후마저 잃었다. 더욱이 세자빈 즉 며느리들이 일으킨 문제는 왕실을 어둡게 했다. 첫 번째 세자빈은 휘빈 김씨였는데 세자가 방에 들지 않자 신발을 태우는 압승술 등의 민간 비방책을 쓰다가 발각되어 폐빈이 되었고, 두 번째 세자빈은 계집종과 동성연애를 벌여 폐빈이 된다. 세 번째 세자빈은 성품이 온화한 후궁 권씨였는데 후일 원손 아기씨 단종을 낳고 이틀만에 죽는다. 세자(문종)는 부왕 세종을 닮은 데가 많았다. 어려서부터 호학했으며 단정했고 아버지처럼 등창까지 심하게 앓고 있었다. 등에 난 종기의 길이가 약 한 자. 엄지 손가락만한 뿌리가 여섯 개나 나와 있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몸이 약한 세자를 보면서 세종은 늘 후사가 걱정되었다. 둘째인 수양대군은 할아버지(태종)을 닮아 기세가 등등한데 원손은 아직 9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은 원손을 무릎에 안고, 신하들에게 뒷일을 부탁해 두었다. 이것이 후일 단종 애사와 사육신의 참사로 이어진다. 그 무렵 세종은 눈이 깔깔하여 더 이상 독서도 할 수 없었다. 시난고난하던 몸이 아주 병석에 눕게 되더니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2월,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1450년, 세수는 54세였다. 오직 그에게 소임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음속 깊게 드리워진 그늘, 신병 그리고 복잡한 가정사 등으로 세종은 결코 행복하지 못한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성군이라는 찬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 뿐인 그의 인생은 오직 성실과 근면, 그리고 피로함 뿐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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