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무덤도 모르는 지상의 손님 -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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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갈 길이 바쁜 줄 알고 그렇게 서둘렀던 것일까? 다섯 살 때 곡을 쓰고, 여섯 살 때부터 유럽 등지로 여행을 다니며 각종 음악을 섭렵하더니 파리에서 크리스천 바흐를 만난 것이 여덟 살 때의 일이다. 로마에 도착해서는 미제레제 를 듣기 위해 시스티나 성당으로 들어갔다. 이 아름다운 합창곡을 듣고 집에 돌아와 오선지에 옮겨놓았는데 조금도 오차가 없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를 신동으로 부상케 한 사건이다. 그는 바티칸 미술관도 구경하였다. 유독 라파엘로의 그림 앞에서 발길이 멎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신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이렇게 훌륭한 그림을 본 적이 없어요. 그의 말에 안내를 해주던 알바니경은 너는 음악세계에서의 라파엘로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다른 사람들은 라파엘로의 작품에 의해 천상에 도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바로 천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처럼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만한 이 두 천재는 우연한 일이겠지만 지상에서 35년간을 머물다가 약속이나 한 듯 서른 다섯 살에 죽었다. 모차르트의 곡을 지휘하며 아름답게, 눈물이 날만큼 아름답게 라고 강조하여 말한 사람은 부르노발터였다. 모차르트는 물질의 고통이 가장 혹심했던 때인 1788년에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세 개의 교향곡을 내놓았다. 그것도 불과 두 달 만이라고 하는데 Eb장조와 G장조, 그리고 쥬피터 라고 불리우는 C장조가 그것이다. 20여 년 전 어느 날 영화 엘비라 마디간 을 보고 나올 때였다. 나는 씁쓸한 느낌에 젖어 쏟아지는 햇빛 속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음악이 귀에서 떠나지 았았다. 트럼프에서 죽음 의 카드를 뽑아든 막다른 골목에 선 두 남녀, 그런데도 피크닉처럼 보이기만 하던 동반 자살의 장면, 아무렇지도 않게 쏙다지는 일상의 햇빛처럼, 그 자살의 장면 위에 피아노 협주곡 제 21번의 둘째 악장이 능청스레 화면 가득히 흐르고 있었다. 눈물을 통해 찬란한 햇빛을 보는 사람 이라고 슈베르트에게 말한 뫼리케의 찬사를 나는 그대로 모차르트에게도 바치고 싶었다. 그 아름다운 선율은 그들의 절망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일생이 불운하기만 했던 모차르트, 그 특유의 신랄한 풍자와 독설 속에 감추어둔 어쩌면 그 고통까지도 보는 듯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는 웃기만 좋아한 어린애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병상에 계신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죽음이란 우리가 아주 가깝게 생각한다면 우리 존재의 참다운 목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최근 몇 해 동안 인류의 가장 좋은 그리고 가장 진실한 이 죽음과 대단히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죽음이 참다운 행복으로 통하는 문의 열쇠라는 것을 터득할 기회를 갖게 해 주신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합니다. 밤마다 저는 이렇게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제가 살아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슬퍼보였다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죽기 바로 2년 전, 과중한 그의 정신 소모는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발전, 악화되어 사람들이 거의 참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운명하기 몇 달 전, 그는 무질서한 생활속에 빠져 알 수 없는 어떤 실체와 뒹굴고 있었다. 충족될 수 없는 영원한 공허감이라고나 할까? 그는 사창가에서 파멸의 쾌락을 탐하고 있었다. 눈은 갈수록 튀어나오고, 마마자국이 있는 얼굴은 노랗게 부풀어 보였으며, 볼품없는 작은 키에 몸은 점점 비대해져 갔다. 죽기 몇 달 전, 그는 몇 푼의 돈 때문에 신원이 알 수 없는 어떤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혼곡을 쓰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요독증이 뇌를 침범한 뒤였다. 그는 신경쇠약과 환각증세 때문인지 작곡을 의뢰한 손님을 저승사자처럼 느꼈다고 한다. 죽음과 싸우듯 그는 하루에 14시간씩 진혼곡 에 매달려 있었다. 얼굴은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고 손발은 심하게 부어 있었다.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시간이 없다 고 서둘렀지만 그는 진혼곡 을 완성하지도 못한채 1791년 12월 5일 새벽, 숨을 거두고 만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심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몇몇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옛 성문이 있는 데서 되돌아가 버렸고, 관은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겨우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그날도 날씨가 얼마나 춥던지 무덤을 파고 관을 묻은 인부들은 묘표 세우는 일을 그만 소홀히 해버렸다. 누구 하나 나무로 만든 십자가조차 관심을 두고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모차르트의 무덤은 알 수가 없다고 전한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무덤도 없는 그는 이 지상에서 단지 손님에 불과했던 것일까?
나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21번 의 선율을 듣게 될 때마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 의 절망과 아마데우스의 천진한 웃음이 절묘하게, 그리고 가슴 아프게 겹쳐오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로 둘은 다 같이 단명하였고 불운하였다. 음악적 재능이 부모에게 일찍 발견되어 부친으로부터 조기교육의 혜택을 받은 것까지 똑같다. 둘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다. 그리고 죽기 두 해 전, 극심한 고통 속에서 두 사람 모두 불후의 걸작품을 쏟아내었다. 모차르트가 세 개의 교향곡을 내어놓을 때, 슈베르트는 교향곡 제9번 과 현악 5중주 를 내놓았다. 죽음의 병상에서 겨울 나그네 의 작곡에 매달리던 슈베르트는 과연 겨울 나그네가 되어 버렸고, 진혼곡 에 몰두했던 모차르트는 그 자신의 진혼곡을 쓰고 있었던 셈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항시 있는 것이지만 이토록 아쉬운 것은 그들의 천재성과 아름다운 음악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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