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1부 아름다운 모성
현모양처의 산수화도 - 신사임당
-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
눍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내리네
시와 문장에 뛰어났던 신사임당은 우리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현부로 꼽혀 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신사임당은 가장 우수한 여류 서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어머님 그리워
산 첩첩 내 고행 천리건마는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 모이락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 할꼬
친정 어머니를 그리는 이 두어 편의 시로 미루어 보아도 그녀는 항상 시심을 간직하고 살아온 천부적인 예술가였고, 서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조선 시대 여류 예맥의 한 정상을 이루었다. 아니 그녀는 여류 시인이요 여류 서화가일 뿐만 아니라 자수가이기도 하고, 그 위에 교육가, 현부인, 효녀, 학문가라는 평가를 함께 받아 온 여인이었다. 1504년 강원도 강릉북평 마을에서 태어난 신사임당은 그녀의 나이 19세 때 덕수 이씨 원수에게 시집을 갔다. 신사임당은 태어날 때부터 인물이 빼어나고 재주가 남달리 비상하여 가정 안에서 배울 수 있는 학문과 예술에 대한 기초적인 실력을 쌓아 나갔다. 신사임당의 서화 솜씨와 문장 실력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사임당의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이사온한테서 한문을 익힌 현부라 사임당은 그 어머니로부터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마을에서는 사임당의 그림 솜씨가 뛰어나자 어린 그녀에게 아낌없는 칭송을 보내었다.
"허헛 참, 송정선생의 딸이 겨우 일곱 살인데도 벌써 안견의 산수화를 놓고 그림 그린다지 않는가." "진정 놀라운 일이네. 안견의 산수화뿐 아니라 그 애는 포도라든지 벌, 나비, 잠자리 따위를 썩 작 그린다는군 그래."
안견이란 세종 때의 유명한 화가인데 신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흉내내어 그림을 그릴 정도로 재주가 있었다. 사임당의 화법은 너무 뛰어나서 감히 견줄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사임당이 잔칫집에 갔더니 부인 한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임당이 그 까닭을 묻자 그 부인은 빌려입고 온 홍금 비단 치마를 더럽혔다며 울먹였다.
"새 것으로 바꾸려 해도 살림이 넉넉지 못해 바꿀 수도 없으니 이 노릇을 어찌했으면 좋을꼬." "제가 새 것으로 만들어 드릴 터이니 너무 상심 마세요."
사임당은 부인을 위안시키고 나서 천을 놓고 붓을 들어 폭마다 포도를 그렸다. 그 포도 송이송이에는 신기롭고 또한 기품이 흐르는 운치가 돋보였다.
"아주머니, 이 포도 천을 가지고 가서 저자에 나가 파세요. 그 값이 치마 몇 갑절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고맙네. 어유, 진정 고마우이."
부인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다.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기도 한다. 사임당이 그린 풀벌레 그림첩을 볕에 쬐려 했더니 새들이 벌레를 마구 쪼아 버려서 그림을 망가뜨린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한번은 사임당이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집 앞 나뭇가지 위에 새가 날아와 앉았다. 그 새의 그림자가 물위에 비치는데 완연한 새의 모습이라, 그녀는 일하던 바늘로 새의 눈동자 부근을 찔렀더니 새가 나뭇가지에서 그대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신사임당이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잉태할 때 일이니까 그녀의 나이 서른세 살 때였다. 어느 날 사임당이 꿈을 꾸었는데 동해에 산다는 신선이 살결이 백옥같이 흰 아들을 안고 와서,
"이 아들을 받으시게."하고 사임당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아기의 몸에서는 신령스런 빛이 솟아 사임당은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과연 그달부터 태기가 있어 잉태한 지 열두 달 만에 율곡을 낳았다. 율곡이 탄생하던 날 밤에 사임당은 또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검은 용이 큰 바다에서 나와 사임당의 침소에 들어왔다. 사임당은 깜짝 놀라 꿈을 깨었다. 흑룡의 꿈을 꾸고 나자마자 태어난 아기, 그가 뒷날 율곡이었다. 사임당 내외는 꿈에 용을 보았다 하여 율곡의 아명을 현룡이라 불렀으며, 율곡을 낳은 침소를 몽룡실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사임당은 여러 자녀들 중에 셋째 아들 율곡을 특히 사랑했고, 율곡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한다. 7남매의 어머니로서 사임당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구 사임당은 평소에 유교의 경전을 읽어 현부의 길을 밟아 나갔다. 7남매를 키우는 틈틈이 익힌 글씨는 뒷날 시인 묵객들의 찬사의 대상이 되기에 족했다. 1868년 강릉 부사로 부임한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보고 이렇게 예찬했다.
"과연 그 필적에 있어서는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며,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저 옛날 무왕의 어머니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명종 때 어숙권의 말이다. "사임당 신 부인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공부했는데 그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 다음가나고 하였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솔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으랴." 사임당은 딸들의 교육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장녀 매창과 넷째 아들 우는 그녀가 기른 빼어난 예술가였다.
외로운 이내 신세 한탄 하노라 범이 차서 가진 임 옷 꿰매노라 사창에는 한 나절 해가 비칠 때 머리 숙여 바느질 손 놀리노라면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네
강가 다락에서 느낀 대로..... 사방들에 가을 빛이 너무 좋기에 혼자서 강가의 다락 오르니 어디선가 풍류객이 날 쳐다보고 술병하고 다락으로 찾아오시네
이매창의 이와 같은 풍부한 감성과 꺼질 줄 모르는 시심은 그것이 그대로 어머니 사임당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었다. 율곡은 뒷날 어머니 사임당을 회고하여 이렇게 쓴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평소에 늘 강릉 친정을 그리며, 깊은 밤 사람들이 조용해지면 반드시 눈물을 지으며 우시는 것이었고, 그래서 어느 때는 밤을 꼬박 새우시기도 했다."
"어느 때 친척 되는 심공의 집 시비가 와서 거문고를 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어머니는 그 곡조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으시므로 온 방안 사람들이 모두 따라 슬픈 생각에 잠겼다."
고행과 모정을 그리는 밤에 눈물짓고, 슬플 때 밤을 꼬박 새우며 울 줄 알았던 천부적 여류 예술가 사임당은 학문과 문장, 그림과 글씨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으며, 아들 율곡을 역대의 스승으로, 아들 우와 딸 매창을 다 그 시대의 추앙받는 예술가로 키워 놓고 1551년 5월,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