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일본의 민요시인 이시가와다꾸보쿠는 이등박문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 추도가 9수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암살사건의 경위와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 아침 동경의 각 신문은 대부분이 모든 지면을 할애하여, 공이 조난당한 보도를 만재했다. 따라서 지금은 조금의 의심이 여지도 없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공은 6일 오전 9시 하얼빈에 도착해, 객차에서 내려 환영나온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던 중, 갑자기 한국 혁명당 청년이 공격을 하여, 복부에 2발의 권총 탄환을 맞아 30분 뒤에 차안의 한 구석에서 잠들게 되었다.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심장-69년간,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신일본의 경영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활기찬 고동을 계속해 온 위대한 심장은 지금 홀연히 첫눈이 내리는 이역의 아침에 그 활동을 영원히 멈추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은 우리들 국민이 마지막 슬픔을 고 공작의 영전에 고해야 하는 날이다. (중략) 하늘도 흐리고 낮아졌다. 우리들은 오늘 더 이상 아무런 할 말이 없다. 공의 흉사가 세계에 미친 감동은 지대하다. 그렇다. 의외로 지대하다. (중략) 우리들의 슬픔은 길다. 그리고 또 이토공으로서는 죽음의 장소를 잘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국사에 몸을 바친, 고인도 은근히 만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인의 심사를 가련하다고 해야할까. 공이여 고이 잠드소서. (이하생략) 위에서 다꾸보꾸가 지적한대로 이토는 죽음의 장소를 잘 얻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국사를 위해 타국을 방문하던 공무집행중에 죽었기 때문이다. 뼈밖에 남지 않은 이 백발의 노인은 평소 동경에 있는 요시하라 술집에 파묻혀 살았는데 취하면 미인의 무릎을 벤 채 잠이 들었고, 깨어나면 천하 권세를 잡았노라. 고 외치던 자신의 말대로 만약, 기생의 무릎을 베고 거기에서 죽었다면 그러한 찬사와 대접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안중근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함으로써 이름을 빛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토는 만주 출행을 앞두고 잠시 망설였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썩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아했다. 야심이 대단하던 그는 이번 만주 여행은 정치적 성격을 띠지 않은 한가한 여행 이라고 선언했지만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의 목적은 관동도독부를 철폐하고 한국통감이 된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중국에 통감을 두어 중국의 재정사무를 감독하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만주문제를 상론하기 위해 러시아대신과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것. 이것이 바로 안중근 의사가 말한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 였던 것이다. 이토는 중국 시찰을 앞두고 주역의 대가인 다카시마라는 사람이 이등박문의 출행점을 쳤다. 득괘는 간위산의 3효동으로 중산간이다. 간은 산 이니 간지간은 산넘어 산 이란 뜻이다. 간은 또한 멈추라 는 뜻이니 원행을 중지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고 그는 말했다. 그를 사살한 안의사의 이름은 중근 (간간은 중간). 다카시마가 풀이한 역의 예시는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