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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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안중근은 노보케에프스크에 체재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친구들에게 블라디보스톡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왜 갑자기 떠나려하는가 물었지만, 안중근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져서 여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이 곳으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동공보와 원동보등의 각 신문을 살폈다. 과연 이토 히로부미가 며칠 안으로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바라고 바라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온 것이다. 친지 김성백의 집에서 유하다 일찍 일어난 다음날 아침, 1909년 10월 26일,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멋있는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권총을 품안에 넣고 역을 향해 나간 것은 오전 7시 경이었다. 역에는 많은 러시아 경찰과 헌병들이 이토를 마중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안중근은 찻집으로 들어가 두세 잔 차를 마시고 이토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였다. 이토는 특별객실안에서 러시아 제국 재무대신 코코흐초프의 영접을 받으며 플랫폼으로 나와 러시아군 수비대의 열병을 받았다. 군악대의 음악이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영접나온 각국 대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일본인 환영객들이 서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나아가는 키 작은 백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안중근은 그가 이토일 것이라 확신하고 권총을 꺼내 그의 우측에서 세 발을 발사하였다. 그는 이토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가 과연 이토인가 의구심이 일어났다. 그래서 혹시 다른 사람을 쏜 것이 아닐까? 하고 망설이면서 후방에서 걸어오는 일본인을 향하여 다시 네 발을 발사하였다. 이때 러시아 장교가 그를 덮쳐 쓰러뜨렸다. 안중근은 넘어지면서 하늘을 향하여 코리아 우라(한국 만세) 를 세 번 외쳤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도망칠 줄 아느냐? 도망칠 생각을 했다면 죽음터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총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철도 총재 나카무라 제코, 무로다 요시부미, 후루야 히사즈나 등의 부축을 받으며 열차 안으로 옮겨졌다. 수행의사 고야마 젠과 거류민단에서 파견된 의사 모리 다카시의 응급조치를 받았지만 고야마가 권하는 블랜디를 입에 머금은 채 가해자가 한국인이란 말을 듣고는 바보 자식 이란 말을 했고, 다시 블랜디를 요구하여 마셨지만, 세 모금째부터는 이미 마실 기력조차 없었으며, 이윽고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9시 30분 피탄 후 30분이 지난 오전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일본인들은 그의 시체를 기차로 대련에 실어갔다.
사건 후 러시아 병사들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한국인 통역을 통해 러시아 재판소 검사의 심문을 받았다. 안중근은 러시아 재판관의 물음에 이렇게 항변하였다. 나는 대한 국민이다. 이토 그놈이 우리의 독립을 강제로 빼앗고, 우리의 민족을 살육하였으나 나의 이 행동은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고, 우리의 민족을 보호하며,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일이 널리 알려지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감동되어 혀를 차며 한국에도 인재가 있다. 한국에도 인재가 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측에서는 한국인의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기에 안중근을 곧 일본 영사관으로 이송하였다. 일본 정부는 안중근과 연루자들을 넘겨달라고 러시아와 교섭하여 러시아의 승낙을 었었다. 그리하여 하얼빈에 있는 한국사람 9명을 체포하여 4일간 심문하고 여순으로 압송하였다. 안중근의 처와 아이들도 하얼빈에서 잡혔고, 두 동생도 진남포에서 체포당한 뒤 공모한 일이 있는가 하여 엄한 심문을 당하며 혹심한 학대를 받았다. 나중에는 여러 친척 집도 모두 수색당하였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씨는 평양의 천주교 성당에 있었는데 경찰이 찾아와서 당신의 아들이 이토 공작을 살해하여 두 나라에 크나 큰 사변을 빚어냈소. 이것은 당신이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이므로 당신도 죄가 없다 할 수 없소. 라고 을러대니 어머니는, 아들이 밖에서 한 일을 내가 알 리 없지만 나라 위해 죽는 것은 국민의 사명이다. 내 아들이 나라 위해 죽는다면 나도 아들을 따라 죽을 것이고 또 죽음을 달갑게 여기겠다. 고 하였다.
안중근은 심문이 시작되자 이름은 안응칠, 나이 31세, 직업은 사냥꾼, 출신은 한국 평안도 평양 교외라고 답하며 자신이 한국인임을 명확히 하였지만, 부모와 처자가 있다는 사실은 숨겼다. 종교에 대해서는 천주교라 답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왜 살해했는가. 라는 미조부치 검찰관의 질문에 그는 당당하게 이토의 죄상을 열거했다. 이토의 열 다섯 가지의 죄상을 그는 미리 마음속으로 정리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1. 10여년 전 이토가 지휘하여 한국의 왕비를 암살하였다. 2. 5년 전에 이토는 한국에 매우 불리한 5개조의 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3. 3년 전에 이토가 체결한 12개조의 조약은 한국의 군대에 불이익을 초래하였다. 4. 이토는 한국황제를 강제로 폐위시켰다. 5. 이토는 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등의 것이었다. 11월 14일의 안중근에 대한 제2회 심문에 앞서 검찰측에서는 독자적인 수사를 벌인 결과, 그의 본명이 안중근이고 그의 조부는 진해군수를 역임했으며, 아버지 안태훈은 천주교도이며 대대로 사대부 명문 집안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동생이 둘 있어서, 정근은 경성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공근은 진남포에서 선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안중근에게는 아내가 있고 다섯 살과 두 살박이 아들이 있으며, 지금 하얼빈에 와 있다는 사실을 모두 포착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말하자 안중근은 단지 모르는 것은 모를 뿐이라고 하면서 난 절대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고 단언했다. 마지막 공판에서 나는 이토를 개인자격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죽였다. 가장 정당한 일을 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심문에 임하여 태연자약한 태도로 당당하게 진술했던 것이다.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후에도 그는 수십 일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여순감옥에 있을 때에는 그는 마치 생사를 잊은 듯,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보였다고 한다. 그가 5개월간이나 기거했던 여순감옥소의 2평 마루 감방은 제2동 2층 왼쪽에 있었다. 음산한 감방복도, 좌우양측 감방에서 협소한 철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광선 아래에서 그는 80여 점의 유묵을 남겼다. 그리고 2천만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글도 지었다. 사형 집행일인 1910년 3월 26일 오전 9시. 그는 새로 지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희색을 띠며 형장으로 나섰다.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는 것이며, 동양의 평화를 위해 죽는 것이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이라면 국권회복의 날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대한이 독립하여야만 동양의 평화가 보장될 수 있고 따라서 일본도 역시 장래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전 10시. 교수대의 대상에 오른 도마 (세례명) 안중근은 3분동안 기도하였다. 이때 그는 32세였고, 그날은 흐린 날씨에 비가 내렸다. 살아서 나라와 민족의 욕이 될 때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라. 던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사형선고가 있은 뒤 안중근을 면회하러 가는 그의 두 동생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게 했다. 상고를 거부하고 깨끗이 교수대에 오르라고,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독립운동에 몸바치려고 끊었던 안중근의 손가락을 평생 간직한 채,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하늘에서 다시 만날 것 을 믿는 천주신앙 속에서 지내다가 48세를 일기로 아들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은 시모시자 즉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일컫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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