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3족을 멸문당한 충절 - 성삼문
성삼문 필적
|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다. 도총관이던 승의 아들로 홍주 노은동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막 낳으려고 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나서 삼문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143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경연관이 되어 세종을 항상 가까이 모시면서 집현전 학사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세조)은 어린 단종을 내쫓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예방승지였던 성삼문은 국새를 안고 크게 통곡을 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뜻을 규합하여 이듬 해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다.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장에서 운검을 쥐게 된 아버지(승)와 무인 유응부가 세조를 죽이기로 하고, 한명회, 정인지 등의 일파를 제거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연회날, 세조가 갑자기 자리가 협소하니 운검을 그만두라 는 지시를 내린다(운검이란 임금곁에서 큰칼을 들고 경호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때 유응부를 계획대로 실행하자고 우겼고 삼문은 훗날을 기다리자고 말하였다. 그러는 사이,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이 겁을 먹고 밀고하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들은 모두 체포되기에 이른다. 노기 등등한 세조의 심문이 이어졌다. 형틀에 매어진 그에게 갖은 극형이 가해졌다.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너라. 나으리의 형벌이 과연 참혹하구나. 성삼문은 세조 옆에 앉아 있는 신숙주를 보며 또 호령했다. 전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으시고 뜰을 거니시며 과인이 죽은 후에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 아이를 생각하라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너는 어찌 잊었느냐. 너의 의리를 저버리는 악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정녕 내 몰랐구나! 무색해진 신숙주를 세조는 전각 뒤로 피하게 하였다. 세조는 유응부를 문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응부도 연회날 내가 창으로써 나으리를 물리치고 옛 임금을 복원케 하려 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제 간사한 무리의 밀고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만 나으리는 나를 빨리 죽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극도로 노한 세조는 무사를 시켜 유응부의 살을 깎으며 고문을 가하였다. 광연전에서 나으리를 죽이지 못한 것이 못내 한이다 라고 하면서 같이 잡혀간 성삼문 등 문신을 복 크게 꾸짖는다. 옛부터 서생들과는 도모하지 말랬더니, 내 말만 듣고 그때 칼을 썼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오! 유응부는 분개하였다. 이개, 하위지도 단근질로 거의 다 죽게 될 무렵 마침내 처형을 당했고 이개의 두 아들도 죽었다. 경회루에 빠져 죽으려 했던 박팽년도 노량진에서 형을 받아 죽었다. 성균관에서 귀가한 유성원은 사당에 나가 절한 뒤 자결하고 말았다. 성삼문은 단근질로 거의 다 탄 몸을 이끌고 형장 새남터로 끌러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북소리 이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 서산을 넘네. 황천길 주막집도 없을 것이니 오늘 밤 뉘 집 찾아 쉬어 볼까나.
대여섯 살밖에 안된 딸이 울부짖으며 행렬의 뒤를 따라오니 아버지 삼문은 뒤를 돌아다보며 말한다.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 그의 부친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 삼고, 삼성 등 세 아우와 그의 네 아들 맹첨, 맹년, 맹종과 갓난아기 까지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당시 성삼문의 나의 불과 37세였다. 가족들도 참사를 면하지 못했으므로 누구 하나 그들의 흐트러진 시신을 거둘 수 없었다. 또 관의 눈이 무섭고 법이 지엄하여 일반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사람의 눈을 피해가며 그들의 시체를 몸소 거둬 가지고 한강 너머의 노량진에 묻은 사람이 있다. 그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었다. 오늘의 사육신 묘 란 표지가 나붙은 자리가 바로 그 장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