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은 선조 40년(1607) 충북 옥천군 구룡리에서 탄생하였다. 부친 수옹공이 청산아사에 있을 때, 종가 제삿날 공자가 여러 제자를 데리고 집에 온 꿈을 꾸고서 아들의 출생을 맞았다고 한다. 선생은 광해군 1년인 세 살 때에 이미 스스로 글자를 깨쳤으며, 어려서부터 늘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나는 와서 배우는 사람에게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불충에 빠지지 않게 하였으며, 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불효에 빠지지 않게 하였으며, 윗사람과 사귐에 아첨하지 않고, 아랫사람과 사귐에 더럽지 않게 하였다. 라고 <송자대전>은 기록하고 있다. 또 나는 가례와 소학을 읽고 몸을 검속하였으며 심경과 근사록을 읽고는 의리를 알았으며, 사서오경은 평생 동안 짊어지고 다니면서 읽어서 남겨둔 대목이 없었다. 고 말했다. 팔십 평생이 오로지 독서로 일관된 생애였다. 인품은 강직하고 말씀이 적었으며 학문의 목적은 의를 구명하는데 두고, 한번 의라는 판명을 하였으면 비록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행하여야 한다고 믿으며, 의롭게 순국한 분들을 일일이 추모하고 저술로 남겨둘 것을 잊지 않았다. 삼학사의 전기를 저술하고, 충신과 공신의 자손을 모두 찾아내어 보살피게 함으로써 그 영혼을 위로하고 절의정신을 고취하였다. 숙종의 비 민중전을 위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간을 하였다. 낳은 지 겨우 몇 달밖에 안되는 장희빈의 아들을 숙종이 원자로 봉하려 하자 선생은 민비 아직 젊으시니 뒷날을 기다려 봐야 한다 는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임금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제주도에 위리 안치된다. 민비가 폐출되자, 선생을 불러다가 국문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제주도를 출발하여 정읍에 이른 것은 6월 8일, 진시에 현재의 위치에서 사약을 받으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고령의 나이로 선생의 병세가 이미 깊어지자 국문하기 전에 운명할 것을 염려한 일당들이 속히 사사할 것을 숙종에게 주청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글을 지어 여주에 있는 효종의 능을 향해 4배를 드리고 하세의 인사를 하였다.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을 짓고 자신을 따르던 문인들을 행해 마지막 말을 남긴다.
나는 항상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신념으로 살았으며 올해 내 나이 80을 넘었는데도, 마침내 도를 들은 바 없이 죽으니 이것이 나의 유한이다. 이러한 시대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도 못한 세상이니 나는 곧 웃음을 머금고 땅 속으로 들어갈 터이니 이 뒤로는 오직 그대들이 도를 이루기를 바라노라. 그리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체로 하고 사업은 효종이 하고자 한 뜻을 주장해야 한다.
청나라에 대한 분통함을 참고 원통한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어떠한 곤궁한 일이 있더라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인통함원박부득기의 여덟글자를 가슴속에 간직하여 동지들에게 전수해서 복수하고 설치할 날 까지 잊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기력이 엄엄하여 눈을 감고 있다고 겨우 뜨면서 지금 시각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더니 시각이 다 되었으니 약을 들이도록 하여라. 약이 늦으면 그 전에 죽을지 모른다. 고 하면서 약을 재촉하였다. 약이 들어오자 옷을 몸에 걸쳐 달라는 시늉을 하였다. 최소한의 예모를 갖추고 수명하려는 것이었다. 어명을 받들어 약을 든다. 때의 춘추 83세요, 휘일은 6월 3일, 기록에 보면 전야에는 큰 별이 떨어지고 흰 무지개가 청사의 지붕에 걸쳐졌다고 한다. 자신의 과오가 없었음에도 이들은 부당하게 내려진 사약의 잔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태연히 재촉해서 받아 마셨다. 대인의 풍모답게 죽음에 있어 모면하려 들지 않았던 점이 존경스럽다. 태연자약하게 독배의 잔을 기울이는 장엄한 모습을 누군가 서산에 넘어가는 붉은 해 같다 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