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6장 예술, 그 광기와 죽음
검은 그림자의 예감 - 에드가 알란 포우 / 보드레르
우울한 생애, 괴기스러운 영혼 - 에드가 알란 포우
내가 포우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그의 단편소설인 <검은 고양이>를 통해서였다. 그 괴기스러우면서도 짜릿했던 전율, 소설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이 바로 그대로 에드가 알란 포우의 인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세기 문단의 귀재 에드가 알란 포우는 미국 보스턴에서 순회 극단의 가난한 배우이던 양친에게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풍부한 상상적 기질도 그런 부모한테 물려받은 게 아닐까 하는 추측들도 하고 있다. 몸은 가냘프기 짝이 없었고 성격은 호방불손하며,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했다고 한다. 두어살 때 어버이를 잃고 어린 나이에 그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담배장사를 하는 숙부의 집에서 자라기도 했으며, 양부모를 따라 영국에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버지니아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그러나 학업에는 열의가 없었고 노름에 빠져 많은 빚만 지고 귀향을 하게 된다. 사관학교에 들어가서도 심한 도박과 음주때문에 학교를 쫓겨나게 된다. 그 이후 웨스트 포인트에 들어갔으나 역시 퇴교당하고 방랑과 무질서한 생활, 술과 도박으로 밤을 지샜는데 이러한 방종한 생활이 오히려 그의 시에 어떤 독톡한 침통함마저 자아내게 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19세에 <티므르 및 그 밖의 시>란 처녀시집을 내었을 때 비범함을 인정받았으며 21세 때 제2시집을 출간하였다. 1833년 발티모어의 잡지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이것을 계기로 잡지 편집자가 되었고 계속 단편을 발표하여 문명을 날렸다. 1836년 포우가 스물일곱 살 때였다. 열네 살 난 소녀, 버지니아 크램을 사랑하여 그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둘은 사람하면서도 행복한 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포우의 음주벽은 갈수록 심해지고 잡지사를 그만 두게 되니 생계가 말이 아니었다. 거기다 불손하고 방종한 그의 성격이 가세하여 일정한 직업, 일정한 주거를 갖지 못하고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기만 했다. 그래도 작품만은 꾸준히 쓰고 있었다. 35세 때 그의 시 중 가장 걸작이라 일컫는 <까마귀>를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고, <브로드웨이 저널>의 편집 및 발행인이 되어 오랜 소망을 이루었으나 재정난으로 곧 문을 닫아야 했다. 1847년에는 헌신적이었던 그의 아내 버지니아가 극심한 가난 속에서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아내에 대한 추억은 그의 작품 <유래카>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아내를 잃은 뒤 술과 마약 때문에 뇌 손상을 입기도 했으나 문학적 재질은 오히려 빛을 발하고 창작 의욕은 꺼지지 않았다. 이때 <애너벨 리>를 발표하였다. 그때 포우는 자신의 견딜 수 없는 병적상태를 이렇게 쓴 바 있다.
내가 네게 작별을 고할 때 가졌던 슬픔의 고뇌를 너는 봤고, 너는 느꼈다. 그때의 그 우울한 내 표정을 너는 기억할 것이다. 재앙을 예견하는 그 무섭고 끔찍한 표정, 그때 나는 진정으로, 진정으로 느꼈다. 심지어 그때에도 이미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를 앞서간 그림자에 내가 연류되어 있음을, 아무것도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침대로 가서 길고 긴 끔찍한 절망의 밤 내내 울었다. 날이 새자 일어나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쌀쌀하고 맑은 공기를 쐬며 빠른 걸음으로 주변을 산책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악마가 나를 여전히 괴롭혔다. 마침내 나는 아편팅크 7그램 정도를 입수했다 나는 너무 심한 병에 걸려있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독하게 병들어 있어 내가 이 무시무시한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내 목숨이 끊어지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그는 죽기 1년 전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다가 아내가 죽은 지 2년째가 되는 1849년 어느 가을 날, 심한 음주 탓인가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정치 브로커들에게 공술을 얻어먹고 술에 취해 볼티모어의 거리에서 쓰러졌다. 행인들에 의해 그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 졌다. 3일만에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머리에 총 한방을 쏘아주면 좋겠다고 그는 말했다. 오, 하느님! 우리가 보는 것이 한낱 꿈속의 꿈입니까? 꿈속의 꿈처럼 보이는 것입니까? 귀찮은 듯 그는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에드가 알란 포우의 가문은 불행하고 단명하였다. 문학적 자질이 있었던 그의 형인 윌리엄도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선원생활 중 동료와 싸워 26세에 사망하였고, 누이동생 로자리는 비정상인이어서 워싱톤의 보호소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포우는 2살에 어버이를 잃고 양모는 20세에, 양부는 25세에 잃고 만다. 그의 아내 버지니아크램은 38세에, 그리고 포우 자신은 이 세상을 40세에 총총히 떠났다. 그는 바쁘게 떠나면서 작품 쓰는 일 또한 바쁘게 하였으니 <까마귀>나 <종소리>등 주옥 같은 시 이외에도 60여 편의 단편을 더 남겼다. <어셔가의 몰락> <황금충> <검은 고양이> <붉은 죽음의 탈> 등의 작품이 있다. 그는 미를 창조하는 데에다 문학의 목적을 두었고, 시에 있어서는 음악성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그의 시가 갖는 암울한 분위기와 우수 그리고 소설에서는 우울한 분위기와 괴기스런 이야기들을 즐겨 다루었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 자신의 취향과 심적나상을 반영한 것이리라.
내 넋을 금이 갔네 - 보드레르
보드레르는 질병, 가난, 고독 속에서 불행하였으나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다. 1821년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35세)마저 다음 해에 서둘러 재혼을 해버리니 어린 마음에는 상처가 깊었다. 열한 살 밖에 안된 그를 의부는 리옹의 기숙사에 집어넣었다. 16세에 벌써 보드레르는 라틴시 콩쿨에서 2등을 하는 재능을 보였으나 18세에는 퇴학처분을 받았고 이미 매독에 걸려 있었다. 사팔뜨기 창녀 사라와 어울리며 방종한 생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회의를 거쳐 식구들은 그에게 여행을 권했는데 이번에는 보르도 섬에서 쟌느 뒤발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14년 간을 동거와 별거를 되풀이 하며 그녀를 애증과 저주의 대상으로 혹은 사디즘과 매저키즘의 대상으로 하여 그는 이 검은 비너스 를 자신의 시집<악 꽃>에 자주 등장시키곤 했다. 그는 오직 쟌느에게서만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는데 아마 흑백 혼혈녀한테서만 마음놓고 상대할 수 있는 어떤 편안함이 그녀에게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들에게 무익하니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위험하니까 자살한다. 는 유서를 쓰고 쟌느와 함께 카바레에서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무렵 보드레르는 미술 평론가로 에세이스트로 시인으로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34세에 <악의 꽃>을 발표하였고 매독이 재발되던 40세에는 <악의 꽃>의 재판과 43세에 산문시집<파리의 우울>을 발표했다. 그리고 44세에 에드가 알란 포우의 시집 제4권을 간행하였다. 이때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이 45세이던 2월 10일 어제 데생전시회를 보러 갔어요. 그러나 몇 분이 지나자 제가 무엇인가에 주의를 집중하게 될 때에 그렇듯이 어떤 나쁜 징조가 닥쳐올 듯이 느껴졌어요. 침대에 누워서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답니다. 이러다가 졸도나 중풍이 닥쳐오면 난 어떡하지? 그로부터 한 달 뒤 성당안에서 내부 장식을 감상하다가 실제로 그는 졸도하였고 중풍이 일어났던 것이다. 우측 팔다리의 반신불수 증세가 나타났다. 보드레르는 어머니에게 최후의 구술 편지를 보냈다. 아! 어머니, 아직 행복해질 시간이 있을까요? 4월 9일 그는 완전히 실어증에 빠졌다. 보드레르의 어머니는 자신의 마비된 다리를 이끌고 아들의 간호를 위해 부뤼셀에 달려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인도되어 그렇게도 오고싶어 했던 파리로 돌아왔으나 그곳은 정신과 요양원이었다. 입원을 한 7월 4일부터 그가 죽는 8월 31일까지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침대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얼마동안은 너무 오래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생긴 상처로 혹독하게 고통을 겪었지요. 그래서 그를 움직여야 할 때는 가끔 아파서 고함을 지르곤 했어요. 그렇지만 임종이 가까워 지면서부터 체념을 하고 무척 온화했었지요. 임종 전의 이틀 낮과 밤은 아주 조용했어요. 그는 두 눈을 뜬 채 잠자는 듯 했지요. 임종의 고통도 없이 아주 조용히 숨을 거두었어요.(생략) 임종을 지켜본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친구 말라시스에게 적어보낸 글월이다. 보드레르는 오전 11시. 어머니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시우 고티에의 말대로 섬세하고, 예리하며, 독특하고 다정스런 금이 간 영혼 보드레르는 졸도, 중풍, 실어증으로 비참한 46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너무나도 짧은 우리들의 여름, 그 발랄한 광명이여! 그의 시구를 떠오르게 하는 짧은 생애였다. 그가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히던 날은 생드뵈브, 아슬리노, 마네, 뽀올베르렌느 등 60여명의 친구들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보드레르는 에드가 알란 포우에게 매우 심취해 있었다. 그의 작품들을 번역하면서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척 이상한 일, 제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 그것은 저 자신의 시와 그 사람(포우)의 시 사이의 내밀한 유사성, 그 불가사의한 일치에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요. 스물 다섯 살때부터 그는 포우의 모르그가의 살인 , 검은 고양이 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2년 3월 4일에는 포우의 생애와 작품 이란 글을 써서 발표하였다. 보드레르는 자기의 성격과 반사회적인 생활조건, 취향, 그리고 미학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까지 포우와의 일치를 발견하고는 몹시 흥분했다고 전한다. 그의 친구 아슬리노도 보드레르의 생애 란 글에서 그가 포우의 작품을 접할 때부터 열중과 찬탄을 금치 못했으며 포우의 예술과 사상, 미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밝혀 두었다.
두 사람의 작품 제목을 비교해 보아도 재미있다. 검은 고양이와 검은 비너스. 어셔가의 몰락과 모르그가의 살인, 죽음의 항해와 파리의 우울. 하나 같이 검고 어둡고 우울한 악의 요소, 살인과 죽음과 몰락뿐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 모두 방종한 생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작에 있어서만은 특이하게 구두점 하나까지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까다로움을 보였다. 인생을 사십대(40세, 46세)에서 불행하게 끝낸 점도 비슷하지만 시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자부심, 거기에 상응하는 노력과 긍지도 실로 대단하였으니 그들은 진짜 시인이었다. 지금쯤 지하의 어느 밀실에서 어쩌면 그들은 검은 잔으로 대작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에 괜스레 나는 혼자 즐거워지는 것이다. |